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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살림 -절기의 지혜를 배운다
입추(立秋), ‘저기’가 아니라 자신을 돌아볼 때

가을이 일어서기 시작한다는 입추(立秋)는 8월 7일입니다. 하지만 말복(末伏)도 이 기간에 있고 실제로는 한창 덥습니다. 언어 개념으로는 시간 단위가 똑 떨어지는 가을목이지만 실제로는 여름이 무르익어 가을이 생겨나는, 그렇기에 “아직 말로만 왔거나/ 혹은 내 마음에만 왔거나”(조문경「입추」에서)한 가을입니다. 사실 일 년 중 작물에 필요한 물과 볕과 뜨거움이 가장 풍부한 때입니다. 그래서 전작으로 심었던 감자나 양배추나 옥수수 걷어낸 밭에 빨리 후작을 심어야 합니다. 괴산의 대표적인 후작물은 콩입니다. 더위가 절정일 때, 땡볕에서 콩 모종을 심는 풍경! 그러나-
웃음소리
- 오철수
넓은 밭
온몸을 옷으로 두른 아주머니 셋이
달팽이처럼 움직인다
옥수수 베어낸 자리 옆에 콩 모종 심는데
햇살에 눌려 정말 납작납작하다
무더위에 보는 것조차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도저히 표현 불가능한 웃음이 쌍으로 솟았다
사람이전 목젖에 붙어 있던 소리 분수噴水
보이진 않았지만 수직으로 내리꽂던 햇살도
강화유리 깨지듯 산산조각으로 쏟아졌을 것인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였을까
여자도 천년은 보지 못했을 여잘
순간 보고 온 듯했던 웃음소리였다
가만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데 밭일을 합니다. 그런데도 웃음을 터뜨립니다. 저 웃음과 비와 볕과 무더위가 하나가 되어 콩을 살리고 우리도 삽니다.
그 무렵이 “아직 덜 식은 몸이 뒤척인다// 바람만 스치면 미쳐버리는 불꽃같던 나날/ 겨우 이겨내고/ 여민 가슴”(김수현「입추」에서)이라고 표현되는 입추입니다. 시간의 관성으로만 보면 초록본능 충천한 ‘초록 불꽃’의 나날이지만, 때를 알아 관성을 추스르고 가슴을 여며야 하는 때입니다. 소유적 욕망을 추구하는 삶에서 잠시 자기를 돌아보는 때입니다. 제가 턱없이 그렇다고 우기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래야 한다고 우주로부터 사인이 옵니다. “우주의 어떤 빛이 창 앞에 충만하니/ 뜨락의 시린 귀뚜리들 흙빛에 몸을 대고 기뻐 날뛰겠다”(이시영 「가을」 전문). 우주의 어떤 사인이 귀뚜라미를 땅 속에서 불러내고, 몸을 점점 더 짙은 흙빛으로 바꾸게 하고, 다른 소리도 아니고 꼭 귀뚜라미 소리로만 울게 명령합니다. 명령을 받은 귀뚜리들, 기뻐 날뜁니다. 그렇게 입추의 밤은 풀벌레소리로 무진장입니다. 남녘으로 귀농한 연극연출가 오경환이 첫 입추의 밤에 시를 썼다고 보내왔습니다. “아무것도 향하지 않은 채/ 소리의 소리로/ 모든 무게를 스르르 무너지게 한다/ 모든 상처를 사르르르 아물게 한다/ 나를 무명無名의 밥벌레로 울게 한다/ 찌르륵찌르륵찌르륵-”(「풀벌레소리」에서) 그 사인은 우주율을 따르는 삶이었을까.
- 오철수(시인. 문학평론가. 흙살림농장농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