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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살림 토종 농장 이야기 3
흙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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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04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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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살림 토종 농장 이야기 3
■ 겨울을 이겨내다
생명이란 참 대단하다. 차가운 겨울을 나는 동안 얼어죽을 줄 알았던 것들이 부활의 몸짓을 보낸다. 흙살림 토종 농장의 정자 옆 작은 텃밭에서 쪽파가 ‘나 여기 살아있어’라며 초록색 손을 내밀었다. 하우스 안의 딸기는 터널을 씌어준 정성이 통했는지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벌 한 마리가 고맙게도 수정을 시켜준 것일까. 아님 봄바람의 힘일까. 손톱만한 딸기가 하나 둘 세상 구경 나왔다. 보리도 키가 쑥쑥 자라고 있다. 이젠 새싹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만큼 키가 컸다.
육묘장에서는 토종고추들이 싹을 틔우고 있다. 붕어초·청룡초·오갈초가 빽빽하게 자라났다. 서로서로 키재기 하듯 하루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파종을 하고 육묘하는 것은 꼭 아이들 키우는 것처럼 정성을 쏟아야 한다. 지나친 고온이나 저온이 되지 않게 온도조절을 잘해야 하고, 과습하지 않게 해야 한다.
올해에는 토종 농장에 수박도 심을 계획이다. 수박은 직접 육묘하지는 않았다. 청주 쪽 재배농가에 위탁한 상태다. 이곳에선 ‘오작교’라는 야생수박 대목을 사용한다. 모가 건강할 뿐만 아니라 수박의 맛도 좋다고 한다. 4월엔 농장 하우스가 어린 모들로 가득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설렌다. 분명 봄이다.
■ 감자를 심다
“또 비네.” 초봄 가뭄에 내린 비는 단비다. 고마운 비다. 하지만 이걸 어쩐다. 감자를 심으려고 싹을 틔워놓고 준비하는데 비가 내린다. 두둑을 만들지 못하니 예정된 날짜보다 늦어진다. 그런데 누가 알겠나. 늦게 심은 덕에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추위를 무사히 넘겨 오히려 피해를 덜 입을지.
아무튼 흙살림 농장에선 올해 두 가지 품종의 감자를 심었다. 하나는 ‘수미’고 하나는 ‘홍선’이다. 수미는 감자칩 광고에 등장하면서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품종이 됐다. 그리고 실제로도 우리나라 감자 중 70% 정도는 수미다. 수미는 1961년 미국에서 육성된 것으로 식용 및 칩 가공용으로 재배되는 품종이다. 우리나라에는 1975년 도입, 1978년 장려품종으로 선발됐다. 식용으로 먹어오다 최근 한 식품회사에서 감자칩으로 사용하면서 칩용으로도 쓰이고 있다.
수미 이전엔 ‘남작’이라는 품종이 가장 많이 재배됐지만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 품종이 남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미국의 ‘아이리시 코블러’가 영국으로 전파되고, 이것이 일본의 가와다 남작에 의해 일본으로 전파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엔 1928년에 처음 도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칩용으로 쓰이는 감자는 ‘대서’라는 품종이 주다. 대서 또한 미국에서 육성된 품종인데 1982년 도입되어 1995년에 장려품종으로 선발됐다. 그런데 긴 휴면기간 탓에 2기작이 힘들어 겨울 동안에는 칩용 감자를 미국이나 호주 등지에서 수입해 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농촌진흥청은 수입을 대체하기 위해 ‘고운’· ‘새봉’·‘진선’이라는 품종을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칩용 감자는 일반 감자보다 크고 모양도 균일한 특성을 갖고 있다.
이외에 제주도에서 많이 재배되는 품종으로 ‘대지’라는 것이 있다. 물감자 같은 맛이 난다. 이들 모두는 흰감자다. 최근엔 감자 개발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어 우리나라 기후에도 잘 자라는 자주감자, 붉은감자가 보급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홍선’이다.
홍선은 지난해 농촌진흥청에서 개발한 것으로 비타민 C 함량이 기존 품종보다 2배 가까이 높고, 껍질이 붉은 2기작 감자다. 우리나라에선 2기작 감자로 주로 일본에서 들여온 ‘대지’를 재배하고 있다. 올해 농장에서 처음 심어보는 홍선이 잘 자라 많은 사람들에게 그 맛을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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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는 우리나라에 180여년 전에 들어왔는데 한때 감자 재배가 이익이 많이 남아 다른 곡물을 생산하지 않은 농부가 많았다고 한다. 관에서는 세금으로 곡물을 받아야 하는데 곡물이 없어 감자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몰래 감자를 재배했다. 감자를 전파하려 해도 감자를 구하지 못하자 소금을 내놓고 감자를 구해 전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감자 이야기
한때는 악마가 먹는 음식이라는 누명까지 썼던 감자, 이제 작은 변화지만 감자가 지닌 숨은 가치들이 다양한 관심을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괴테가 “신이 내린 가장 위대한 축복”이라고 찬사를 보낸 것처럼 감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해보자.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감자를 여전히 파타타로, 프랑스에서는 폼므 데 테레(pomme de terre : 땅속의 사과라는 뜻)라고 부른다. 프랑스요리 이름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감자를 사과란 뜻의 폼므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감자의 어원은 ‘북방에서 온 고구마’라는 뜻인 북방감저(北方甘藷)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고구마를 달다는 뜻의 감저(甘藷)라고 불렀다.
감자가 스페인에 첫발을 디딘 이래로 유럽 전역으로 전해지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유럽인들은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남미의 원주민들이 주식으로 먹던 감자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감자는 가난하고 미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라는 편견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땅속뿌리에서 자란 감자는 마치 사마귀자국처럼 보였고 감자의 울퉁불퉁한 모습과 작은 점들은 무서운 병이었던 천연두를 연상시켰다.
흙이 잔뜩 묻은, 불결해 보이는 감자를 그 당시 유럽 사람들은 악마나 먹을 법한 음식이라는 악평을 하며 만지기만 해도 병을 얻는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편견 때문에 초기에는 가축사료용이나 호기심 많은 식물학자들의 연구용으로 쓰였다.
감자를 터부시하는 경향은 빈곤에 시달리던 하층민들 사이에서 더 심해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감자를 먹는다는 것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감자가 나병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소문이 영국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나병이라는 끔찍한 병이 마치 감자에서 비롯된 것처럼 여기고 이를 믿기 시작했다. 이런 소문은 유럽 전체로 퍼져 감자를 피하는 더 큰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감자가 유럽 전파 초기에 식량으로는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한 반면, 귀족들의 정원에서는 사랑을 받으며 자라나고 있었다. 바로 감자가 최음제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 당시 유럽 사람들은 무, 양파, 고구마 같은 뿌리식물들이 성욕을 자극한다고 믿었다. 유럽인들이 이런 믿음을 갖게 된 데는 성경 속에 최음제로 등장하는 맨드레이크(mandrake) 때문이었다.
사랑의 사과(love of apple)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맨드레이크는 강한 최면제로 쓰였고 여성의 월경촉진제 같은 민간요법용으로도 쓰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맨드레이크와 같은 뿌리식물인 감자 또한 최음제 역할을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영국의 헨리 8세도 이런 이유 때문에 그의 정원에서 감자를 키웠다.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감자꽃을 옷단추 사이에 꽂아 장식하기도 했고 그의 아내인 마리 앙트와네트는 보라색 감자꽃을 머리에 장식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왕족들이 쓰는 그릇에도 감자꽃 문양을 그려 넣기도 했다. 셰익스피어의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이라는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두 여자와 동침하는 걸 꿈꾸며 온 하늘이 감자를 뿌려주길 바란다고 빌기도 한다.
유럽에서 감자를 가장 먼저 식용작물로 재배하기 시작한 곳은 아일랜드였다. 이런 배경에는 아일랜드 지역이 감자를 재배하는데 최적의 기후와 토양을 가졌다는 것 외에도 사회적인 영향이 컸다. 영국인들의 지배에서 빈곤과 가난을 거듭하던 아일랜드인들에게 쉽게 잘 자라고 다른 곡물에 비해 생산량도 월등히 많은 감자는 신의 축복이었다.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특히 주식이었던 빵을 만드는 것과는 달리 씻어서 삶거나 굽기만 해도 먹을 수 있는 간편한 조리법 때문에 가난한 농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일랜드에서는 감자요리에 감자반찬을 먹는다는 얘기를 할 정도로 감자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음식이 되었다.
이렇게 감자는 빈곤으로부터 탈출하는데 주요한 역할도 했지만 바로 이 감자 때문에 약 100만명의 사람들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는 1845년부터 1850년까지 일어난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 때문이었다.
이는 감자에 의지하던 이들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감자역병으로 감자는 모두 죽어갔고 감자가 유일한 식량이던 사람들 또한 감자처럼 죽어나갔다. 아일랜드인들의 인구는 800만명에서 대기근 이후 650만명으로 줄어들었고 이 기근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북미대륙으로 100만명 이상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미대륙으로 건너간 아일랜드인들에 의해 미국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의 조상도 이 시기에 미국으로 건너온 아일랜드인이다. 아일랜드 대기근은 아일랜드 역사상 가장 큰 재앙으로 남았고 대기근이 미친 역사적 영향도 그에 못지않게 컸다.
독일에서는 감자의 가치를 미리 인지한 왕족과 영향력 있는 군주들이 유럽을 통해 감자를 받아들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감자대왕’이라고 불리는 프러시아의 프레데릭(Frederick) 대왕이다. 그는 감자가 빈곤에 시달리는 나라를 구할 수 있고 높아만 가는 빵 가격을 떨어뜨릴 수 있는 자원으로 정확히 보았다. 다른 유럽의 왕족들이 감자를 권장하면서도 막상 자신들은 감자를 관상용으로만 이용했던 것과는 달랐다.
오늘날의 감자요리를 이야기할 때 루이 15세의 신하이자 학자였던 앙투안 오구스탱 파르망티에(Antoine Augustine Parmentier)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감자를 터부시하던 귀족, 왕족들에게 감자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프러시아의 7년전쟁(1756~1763년) 때 감옥에 갇혀 있었던 파르망티에는 배급으로 맛본 감자가 훌륭한 음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파르망티에는 파리에서 대량의 감자수프를 만들어 굶주린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를 안 루이 16세는 그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빵과 같은 감자를 알게 해준 당신에게 언젠가는 프랑스가 고마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존경심은 그의 이름을 딴 감자요리인 포타지 파르망티에(potage parmentier)와 폼므 파르망티에(pomme parmentier) 등에서 알 수 있다.
유럽에서는 감자가 정착하기에 꽤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북미의 식민지 사람들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게 정착할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에 미국대사로 파견되었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감자요리를 맛본 이후, 그 맛에 반해 다양한 감자요리를 미국에 소개했다.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백악관을 찾은 손님들에게 여러 가지 감자요리를 선보이게 되면서 미국인들에게 감자요리가 빠른 속도로 보편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