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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방재일월기-한 때를 보내더니
흙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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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25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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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를 보내더니 다 어디로 갔나’
봄부터 시작해 봄, 여름 사이에 심은작물을 하나하나 거두어들인다. 40여종의 벼를 여문 차례대로 낫으로 베 볏단으로 묶는다. 조생, 중생, 만생종이 고루 섞여있어 이미 황금색 이삭이 여문 것도 있고 아직도 푸른 잎사귀인 채로 여물어 가고 있는 것도 있다. 황토조, 올벼같은 벼는 대표적인 조생종이어 벤지가 여러 날 됐고 만생종인 녹미, 족제비찰벼 같은 벼는 아직도 녹색이다.
삼방리 논은 종자 수집을 목적으로 한 농사여서 수확, 건조, 탈곡을 서로 섞이지 않게 정성들여 작업해야 한다. 옥천 돼지찰벼를 심은 1천평 제월리 논은 콤바인으로 수확한다. 벼농사는 지난 10월9일 회원초청 토종벼베기 행사를 마지막으로 올해 공식적인 일정이 끝나서
벼를 베고 탈곡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
11월이면 탈곡도 끝나 벼농사일은 모두 마무리될 것이다. 고구마도 거의 캤다. 전에 논으로 쓰던 땅이어서 토질이 질어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참깨도 베어 건조시켜 털었다. 들깨는 아직 거두지 않았는데 조만간 베게 될 것이다.
고추밭도 정리중이다. 맨땅 고추밭은 모두 정리했다. 비닐하우스 7개동, 7백평에 심은 고추는 아직 애기고추가 달리고 있어 따내야 하고 이 작업이 마무리 되면 그물망, 말뚝, 비닐, 고추대를 철거하게 된다. 그러고 나면 하우스는 텅비게 될 것이다. 고추밭은 우리에게 기대와 실망을 함께 가져다 주었다. 8월말 9월초 까지만 해도 빨갛게 익은 고추를 제때 따기 바빠 일정잡기와 사람구하기가 어려웠다. 이대로라면 고추 대박이었다. 그러나, 9월초부터 상황은 변했다. 유례없이 자주 내린 비와 우중충한 여름 날은 습도를 높이고 일조량을 줄여 작물성장에 치명타를 날렸다.
9월에는 고추 딸게 없었다. 특히 노지 고추밭은 탄저, 역병의 병해에 모두 타버렸다. 비가 온 날이 더 많았던 8~9월의 날씨는 우리만이 아닌 모든 농가에 최악이었다. 그런 고추밭을 정리하려니 마음이 착잡했다. 부직포 걷고 비닐 걷고 쇠말뚝 뽑고, 고추대 걷고, 청소하고
간수하는데. 그동안 들인 노력과 시간, 자재비를 생각해보니 한 숨이 쉬어진다.
아무리 날씨가 그랬다고 하지만 고추 농사가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현실을 눈앞에서 맏딱드리니 농사짓는 사람들의 속마음과 현실이 찌르르 전해온다. 마음이 쓰다.
이제 농장에 수확할 품목은 많지 않다. 제일 많은 것은 콩 수확이다. 잎이 차츰 노랗게 말라가고 있는데 이 역시 날씨탓인지 콩알 앉는 것이 시원치않아 보인다. 그리고 아주까리가 이십여 그루농장 출입구에 나는 언제 베어줄 것이냐며 서 있고, 해바라기는 모두 검게 시들었는데 성장이 좋지않아 씨수확을 기대할 것은 아니다. 본래 농장 주위 경관용으로 심은 것이니 그도 여름가을 동안 할 일 다했다.
또, 호박 넝쿨은 농장 도로편 경사진 둔덕을 여름날 지맘껏 팔 휘젓고 고개 돌리며 자라면서 여기저기 똥누듯 덩이를 앉혀놓았는데 자리를 찾아 거두어들이고, 시험적으로 심은 야콘 한 두둑, 역시 시험삼아 심은 율무 반 두둑 거두는게 남은 일이다.
수확할 일 말고 이제 가장 큰 일은 당연 배추, 무 농사다. 지난 8월 5백여평 밭에 배추와 무를 심었다. 배추는 절임배추용이고 무는 김장용이다. 둘다 기세좋게 넉넉히 자라고 있다. 농장에 온 사람은 누구나 배추농사 아주 잘 됐다며 한마디씩 보탠다. 최근 배추 한 포기에 1만원이 넘게 간 깜짝 놀랄만한 일을 겪은 탓도 있어서 사람들의 배추 살피는 눈길이 예전과 다르다. 뭐든지, 비싸지고 귀해지면 대하는 게 달라진다.
농산물 값이 비싸져야 한다. 그래야 귀한 줄 알지. 배추는 3개월 정도 키우는데 11월 초중순 무렵이면 뽑게 될 것이다.웃거름액비도 주고 병충해 방제를 꾸준히 해나가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뭐니 해도 농사는 날씨가 도와줘야 한다. 혹시라도 수확전에 눈이나 된 서리, 이상 저온이라도 오게 되면 배추도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이 부디 없어야 할텐데.
가을이 깊어졌다. 산에는 단풍이 절정인 모양이다. 내가 맞는 이 가을은 가라앉고 조용하다. 왜일까. 가을 탓이겠지.
봄엔 차츰 낮이 길어지면서 심고 키우고 땀 흘리는 일이 많더니, 가을되니 모든 것이 떨어지고 시들고 잠들어간다. 한창 잠자리가 가을하늘을 제 안방마냥 무리지어 휘젓더니 그 수가 드믈어졌다.가끔 놀래고 기겁하게 했던 뱀도 눈에 안띤다. 사마귀, 여치, 방아깨비도 사라졌다. 논 풀을 잡아줬던 우렁이도 모두 죽었다. 요란하던 풀더미 자연 합창대 벌레 소리도 미약해졌다. 들판의 모든 것이 그렇다. 한 때를 보내더니 그들 다 어디로 갔나.
<글 : 정혁기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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