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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방재일월기-녹음방초가
흙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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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25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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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방재일월기
녹음방초가(綠陰芳草歌)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침이면 새롭게 피어나던 봄꽃들이 지고 풀씨가 바람결에 날리기 시작하면 여름이 다가온다. 그 중 할미꽃이 보여주는 봄꽃의 생은 과연 ‘할미’라는 이름다운데, 봄날 내내 얼굴 크고 키 작은 처녀인 게 부끄러워 고개 숙이고 지내더니 6월이 오기도 전에 늙어서 흰머리를 바람에 날린다. 양지바른 봄날 다소곳 고개 숙인 고아스런 자태에 '할미'라니 웬 말인가 싶었는데, 봄 뒷자락에 벌써 백발이 되어버리니 왔는가 느낀 사이에 가버린 봄날 청춘이 서러운 성 싶다. 할미꽃뿐이랴. 봄꽃들이 그렇게 멀어져 간다. 노랑, 분홍, 하양 화사했던 봄날이 푸른 녹색으로 채워지면 봄 바람기 나던 마음도 심드렁해져서 모내기도 끝낸 터라 마음으로는 거지반 농사를 지어버린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꽃은 줄지어 피어나고 쭉쭉 무럭무럭 산과 들에 풀과 나무가 자란다. 찔레꽃이 지고, 애기똥풀 꽃도 뜸해지고, 애벌레들이 부화하여 나비되어 날아오르고 뻐꾸기, 개구리가 울면, 그 사이 여름이 들어앉는다.
여름되니 무엇보다 햇볕이 강해졌다. 비스듬이 비치던 태양이 머리 위에서 내리쬔다. 사람들은 덥다하지만 풀은 제 세상을 만났다. 풀의 세상이 펼쳐진다. 옥수수, 감자, 고구마, 고추 밭에 일신우일신 풀이 자라 오른다. 뽑고 돌아 나오면 다시 올라온다. 땅속에 내린 풀뿌리 힘이 만만치 않아서 뽑는 것도, 땅이 굳으면 호미질도 쉽지 않다. 자라는 속도가 사람 생각을 앞선다. 농부에게 여름은 열기 속에서 벌이는 풀과의 싸움이다.
인류는 이 풀을 잡기 위해 농사에 이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과 지혜를 개발해 왔다. 가장 혁명적인 방법은 1940년대에 개발된 제초제의 출현이었다. 화학농약제로 이사디(2,4-D)와 MCPA가 개발되면서 잇따라 수백 종의 제초제가 개발되었다. 화학적으로 합성된 농약을 뿌려 풀을 죽이는 제초제는 전통적인 농사 환경을 크게 변화시켰고, 풀매는 농사 노동을 대폭 줄여주었다. 제초제를 쓰면 풀매는 노동이 열 배 이하로 줄어든다는 말이 실감난다. 바쁜 농사철엔 사람 구하기도 힘들고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할 판이다.
현대 제초제는 합성 농약에서 더 나아갔다. 미국의 몬산토사는 자사제품 제초제를 치면 다른 모든 풀은 죽지만 그들이 공급한 콩은 죽지 않는 이른바 ‘제초제 저항성’ 콩도 개발해 시판했다. 콩은 GMO제품이었다. 제초제는 ‘라운드업레디’라는 강력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 콩과 제초제는 세트 상품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독한 ‘라운드업’에 대해서조차 내성을 지닌 수퍼잡초가 대거 발생해 미국의 콩, 옥수수 농사를 위협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제초제가 해결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사례다.
<삼방리 농장>에서는 풀을 잡기 위해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다. 제초제가 생태계에 해롭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둑에는 비닐을, 골에는 부직포를 덮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고랑에 짚과 낙엽을 깔기도 하고 노지 상태로 두기도 한다. 논에는 우렁이를 넣었다. 그러나 땅바닥을 뒤집어 고르고 며칠만 지나면 벌써 파랗게 풀씨들이 싹을 티며 올라오는 양을 보면 풀들의 세상이 놀랍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밭에서 풀매는 일을 하다보면 절로 농사일 못 해먹겠다는 말이 나올만하다. 작은 농사를 늘려 경작 규모가 커지면 더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농법에 대한 실용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지난주까지 고추, 고구마, 옥수수 밭에 풀을 매고 부직포 까는 일을 마무리 했다. 풀 예비 단속이 된 셈이다. 논에 잡초 올라오는 것은 우렁이가 잘 해내주길 기대하고 있다. 풀과 다투다 보니 절로 풀이름도 익숙해진다. 명아주, 바랭이, 독사풀, 쇠비름, 질경이..... 올라오는 풀들이 다양하다. 성질도 다르다. 비교적 뿌리가 잘 뽑히는 놈이 있는가 하면 땅을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 세게 거부하는 놈도 있다. 잎과 줄기가 질겨 밟혀도 일어서는 녀석이 있고, 부드럽고 물러 보이지만 빠른 성장으로 잎을 펼쳐 땅과 햇볕을 독점해버리는 녀석도 있다. 농사라는 것이 원래 풀이 자라는 자리를 뺏아 경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풀에 인정을 베풀만도 하건만 타협은 없어 보인다. 농부의 여름 시절은 풀과 함께 간다. 콩밭 매는 아낙내의 베적삼이 젖는다는 유행가처럼 옷이 땀으로 젖고 햇볕에 마른다. 한 여름 하루 해가 짧다.

<글:정혁기(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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