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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김수원-산들바다 바람부는 마포천에서 평생의 길 찾기를 한 농부
흙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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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21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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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바다 바람부는 마포천에서 평생의 길 찾기를 한 농부<부안 김수원>

화려한 단청의 사찰이 양반절이라면 내소사는 단청이 없다. 그야말로 서민사찰이라 송림길을 여유롭게 지나 사천왕상에 들면 참 편안하다. 바로 옆에 그런 내소사를 끼고 있는 변산 마포에 참 편한 얼굴의 김수원 씨(45)가 살고 있다. 그가 속한 유기농공동체 ‘산들바다’는 20년간 유기농을 일궈온 전북 부안지역의 선구자들. 지금 그는 새로운 마을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유기농문화마을’을 위해 그는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주춧돌 하나를 놓는다. 언제까지나 유기농의식을 간직하며 살 그는 참 건강하다. 이빨 드러내고 웃는 그의 웃음도 밝고 건강하다.
산들바다 공동체는 1970년대 후반 부안농민회의 산파 역할을 한 오건, 박배진 씨와 정경식 씨의 실천적인 모습이 의기투합되면서 싹을 틔웠다. 부안에서도 변산 지역이 농민회 운동을 가장 먼저 시작했다. 그 때 농민회 정신이 현재 산들바다의 정신적 뿌리다. 90년대 들어 ‘한울’이란 공동체가 만들어져 변산의 생산자 조합과 전주의 소비자 조합이 비인가 직거래하다가 2002년에 산들바다 공동체로 재편되었다. 현재 산들바다 공동체에는 15가구가 있다. 회장인 이백연 씨와 김수원 씨 등 3~4명만 이곳 출신이다. 나머지는 귀농자 가족. 부안군 변산면 몇 개 마을에 산재해 살고 있다.
20년 된 유기농 공동체인 이곳은 전 회원이 유기농을 한다. 소비자 방문지 1순위로 꼽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그러나 구성원들은 명분보다는 얼마나 내적충실을 기하며 사느냐, 유기농에 소양이나 소질이 맞느냐에 주안점을 두고 내부토론을 많이 한다. 시대 조류에 따른 변화의 요청도 많이 받지만 지금까지는 공동체의 내실을 더 기하자는 쪽이 우세하다. 좀 느슨하지만 같은 지향점이 오래 쌓여 인간적 신뢰가 형성됐다.
산들바다 공동체 회원들은 각자 생산해서 공동출하를 한다. 주로 전주 한울생협이나 서울의 한살림에 공급한다. 작부체계는 서로의 형편을 고려해 설계를 상의해서 한다. 회원 가족 모두 독자적으로 경제를 꾸릴 수 있도록 서로를 책임져 주는 형태를 스스로 만들었던 것. 회원의 반 이상이 다른 살림 공동체를 통해 들어온 회원이라 공동체의 한계도 뚜렷이 겪은 사람이 많다. 그들은 지금 ‘지역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토의를 많이 한다. 공동체의 문은 고정하고 공동체를 이용해 뭔가를 할 생각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념단체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것을 오히려 자족하고 있다.
그는 이곳이 고향이다. 이곳에서 나서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전북대 국문과를 나왔는데 대학 다닐 때만 전주에 나가 있었다. 크리스천인 그는 신앙의 결단으로 농촌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도회지에 가면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가르칠 사람이 많지만 시골은 가르칠 사람이 없으므로 대학 졸업 후 그의 시골행은 보수적 신앙관에 따른 자연스런 발걸음이었다는 것이다. 역시 신앙적 결단으로 유기농을 하게 되었단다.
이곳은 예부터 유배지나 빨치산 본거지로 유명해서 그런지 반골정신이 강한 곳이다. 산들바다 공동체는 단순히 유기농뿐만 아니라, 지역 환경 문제에도 적극이었다. 특히 핵폐기장반대 투쟁 때 다수가 수배되기도 하고, 삭발투쟁한 15명의 여성 중 산들바다 식구가 6명이나 될 정도였다. 골프장 반대투쟁에도 산들바다 식구들이 10여년째 앞장섰다.
그의 농사규모는 공동체 식구 중 가장 많은 축에 속한다. 자작이 2,000평, 임대가 7,000평이다. 주로 밭농사 위주다. 논은 자급용 3마지기 정도. 양채류와 채소, 양념류, 고추, 단호박, 시금치, 마늘, 수세미 등 가짓수가 많다. 10가지 정도는 출하를 위해 농사짓고 집에서 먹는 것까지 합하면 30여 가지나 된다. 쓴것, 단것 다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잡곡농사를 많이 했는데 생산량이 떨어져 대신 단수수, 콩, 녹두를 윤작개념으로 지어 녹비로 벤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땅을 놀리면 큰일 나지만 녹비나 윤작 개념으로 땅을 비우고 돌아가면서 놀리기도 한다. 병충해도 많고 일손도 달리지만 급할 때는 동네 아주머니들 손을 빌린다. 공동체 식구 중 이곳 토박이들은 규모가 많고 귀농자들은 1,000평 정도 농사짓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격차가 심하다.
산들바다 공동체는 1970년대 후반 부안농민회의 산파 역할을 한 오건, 박배진 씨와 정경식 씨의 실천적인 모습이 의기투합되면서 싹을 틔웠다. 부안에서도 변산 지역이 농민회 운동을 가장 먼저 시작했다. 그 때 농민회 정신이 현재 산들바다의 정신적 뿌리다. 90년대 들어 ‘한울’이란 공동체가 만들어져 변산의 생산자 조합과 전주의 소비자 조합이 비인가 직거래하다가 2002년에 산들바다 공동체로 재편되었다. 현재 산들바다 공동체에는 15가구가 있다. 회장인 이백연 씨와 김수원 씨 등 3~4명만 이곳 출신이다. 나머지는 귀농자 가족. 부안군 변산면 몇 개 마을에 산재해 살고 있다.
20년 된 유기농 공동체인 이곳은 전 회원이 유기농을 한다. 소비자 방문지 1순위로 꼽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그러나 구성원들은 명분보다는 얼마나 내적충실을 기하며 사느냐, 유기농에 소양이나 소질이 맞느냐에 주안점을 두고 내부토론을 많이 한다. 시대 조류에 따른 변화의 요청도 많이 받지만 지금까지는 공동체의 내실을 더 기하자는 쪽이 우세하다. 좀 느슨하지만 같은 지향점이 오래 쌓여 인간적 신뢰가 형성됐다.
산들바다 공동체 회원들은 각자 생산해서 공동출하를 한다. 주로 전주 한울생협이나 서울의 한살림에 공급한다. 작부체계는 서로의 형편을 고려해 설계를 상의해서 한다. 회원 가족 모두 독자적으로 경제를 꾸릴 수 있도록 서로를 책임져 주는 형태를 스스로 만들었던 것. 회원의 반 이상이 다른 살림 공동체를 통해 들어온 회원이라 공동체의 한계도 뚜렷이 겪은 사람이 많다. 그들은 지금 ‘지역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토의를 많이 한다. 공동체의 문은 고정하고 공동체를 이용해 뭔가를 할 생각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념단체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것을 오히려 자족하고 있다.
그는 이곳이 고향이다. 이곳에서 나서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전북대 국문과를 나왔는데 대학 다닐 때만 전주에 나가 있었다. 크리스천인 그는 신앙의 결단으로 농촌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도회지에 가면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가르칠 사람이 많지만 시골은 가르칠 사람이 없으므로 대학 졸업 후 그의 시골행은 보수적 신앙관에 따른 자연스런 발걸음이었다는 것이다. 역시 신앙적 결단으로 유기농을 하게 되었단다.
이곳은 예부터 유배지나 빨치산 본거지로 유명해서 그런지 반골정신이 강한 곳이다. 산들바다 공동체는 단순히 유기농뿐만 아니라, 지역 환경 문제에도 적극이었다. 특히 핵폐기장반대 투쟁 때 다수가 수배되기도 하고, 삭발투쟁한 15명의 여성 중 산들바다 식구가 6명이나 될 정도였다. 골프장 반대투쟁에도 산들바다 식구들이 10여년째 앞장섰다.
그의 농사규모는 공동체 식구 중 가장 많은 축에 속한다. 자작이 2,000평, 임대가 7,000평이다. 주로 밭농사 위주다. 논은 자급용 3마지기 정도. 양채류와 채소, 양념류, 고추, 단호박, 시금치, 마늘, 수세미 등 가짓수가 많다. 10가지 정도는 출하를 위해 농사짓고 집에서 먹는 것까지 합하면 30여 가지나 된다. 쓴것, 단것 다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잡곡농사를 많이 했는데 생산량이 떨어져 대신 단수수, 콩, 녹두를 윤작개념으로 지어 녹비로 벤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땅을 놀리면 큰일 나지만 녹비나 윤작 개념으로 땅을 비우고 돌아가면서 놀리기도 한다. 병충해도 많고 일손도 달리지만 급할 때는 동네 아주머니들 손을 빌린다. 공동체 식구 중 이곳 토박이들은 규모가 많고 귀농자들은 1,000평 정도 농사짓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격차가 심하다.

예전에는 식물성 천연자재들을 많이 만들어 쓰곤 했는데 지금은 흙살림자재에 많이 의존한다. 잎살림시리즈는 채소농사에 필수다. 매년 2월초 평당 쌀겨 1.5kg, 깻묵 0.5kg, 어분(불가사리)1kg을 혼합하여 발효시킨 후 기비로 사용한다. 추비는 평당 생쌀겨 1kg을 생육 중에 뿌리 부근에 시용한다. 지리적 특성상 불가사리, 멸치 등의 어분을 구할 수 있어 150~200kg을 쌀겨 500kg과 깻묵 500kg에 첨가하여 4~5회 뒤집어 주면서 2~3개월 발효시킨다. 작물에 사용할 때는 정식 2개월 전에 어분발효퇴비를 평당 2kg씩 넣고 흙살림 균배양체를 0.5kg씩 뿌려준다. 벌써 퇴비를 준비하느라 한창이었는데 공동체 회원들이 쓸 퇴비자재들을 내리느라 카고크레인까지 동원되었다. 톤백에 담긴 왕겨부산물이 수십 개 내려지고 있고 그 옆에는 불가사리 퇴비가 잔뜩 발효되고 있다.
“농민은 양심적으로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러면 양심적인 유기농을 먹는 도시소비자들이 그 농민의 이익도 지켜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소비자를 그냥 소비자로 말하지 않고 가족이나 동지로 부릅니다.”
올해 새로 뽑힌 한살림청년생산자 위원장이기도 한 그는 소비자들과 만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소비자를 만나면 5분 내에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특기란다. 소비자가 곧 시혜자가 아니라 배를 함께 타고 파도를 헤치는 동지라고 정의한다. 그는 지금 구체적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마을의 전형을 만들기 위해 소비자 교류를 활성화하려고 궁리를 거듭하고 있다. 유기농업 생산자 역할뿐 아니라 환경, 생태, 평화, 지역의 문제를 폭넓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2006년 개관한 부안생태문화활력소는 폐교된 마포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 만든 지역의 생태문화공동체다. 산들바다공동체 사람들은 이곳을 ‘아지트’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어린이집, 주민도서관, 풍물실, 부안문화관, ‘부안의 밥상’관, 마을영화관, 숙소 등이 있다. 천연염색과 우리옷 만들기, 함께하는 부안문화답사, 생태문화체험, 대보름행사 등을 기획하고 있고, 사회취약계층을 위한 영상편집 등 미디어교육도 이뤄질 예정이다. 또 생태학교도 구상 중이다.
또 이곳은 마포천을 끼고 양 옆으로 마포마을과 산기마을로 나뉘는데 이 마포천을 중심으로 두 마을이 공동으로 ‘꿈을 이루는 마포리 만들기’라는 마을가꾸기 사업에도 산들바다 식구들이 활약하고 있다. 두 마을의 이장이 마포 만들기 공동위원장으로 각 마을회의에서 뜻을 모으고 두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함께 논의해서 추진하고 있다. 마포 만들기 총무를 맡은 사람이 바로 김수원 씨다. 300년이 넘은 팽나무가 버티고 있는 마포천을 중심으로 한 생태마을 만들기가 핵심이다. 2.3km의 짧은 마포천 제방길을 걷다보면 산, 들, 민물, 바다를 한꺼번에 호흡할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제방길을 따라 산책하고 운동하는 코스로 이용하고 있다. 마포천 정비공사는 마포 만들기 사업과는 별개로 부안군에서 시행하는 수해방지용 공사였다. 그러다보니 생태와 거리가 멀어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두 마을이 회의를 통해 나온 의견들을 반영해 설계변경과 시공변경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주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일정한 재원은 지자체에 요청하는 형태로 몇몇 작업에 들어갔다. 농촌다움을 유지하면서 생각 있는 소비자들을 끌어들여 자연체험을 하게 하려는 것이다. 전적으로 마을 자체에 코드를 맞추고 있다.
당산나무 주변 공원화, 생태 마포천 만들기, 마포교 생태학습체험 공간으로 개축, 들꽃단지 조성, 친환경 마포들판 만들기, 마을 생활사(역사) 박물관 건립, 마포천 제방길 꽃나무 가로수 조성, 마포천 제방길 산책로 및 자전거 전용도로, 독살 복원, 염막 복원, 소달구지 체험길 만들기, 외갓집민박 등 마을공동체와 생태를 생각하는 올바른 방향을 주민 스스로 제시하고 있고 마을 힘으로 관철시키고자 하는 주민들의 의지가 있어 이곳의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 같다. 유기농문화마을, 그가 꿈꾸는 최종 도착지다.
씨 뿌린 만큼 걷고,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는 것이 좋다는 부인 한숙희(39) 씨는 같은 동네 후배. 가방 들고 학교가는 대학생 오빠 김수원 씨가 멋있어서 설레는 가슴을 누르며 그 앞을 일부러 지나기도 했을 만큼 부인이 더 좋아했다고. 2남1녀 아이들, 한울, 한별, 한샘은 늘 아빠를 기다린다. 30분씩 축구를 하며 잘 놀아주고 신경을 잘 써주기 때문이다. 일이 바쁠 때는 초등학교 4학년, 2학년, 유치원생까지 2남1여 아이들을 조퇴시키고 농사일을 돕게 한다. 학교공부보다는 농사일 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의도적으로 주려고 한다. 학원과외 전혀 안 시키고 공부에 스트레스를 덜 받게 하고 빵점 맞은 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노력한다. 자연 속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는 게 최고의 교육이다는 생각이다. 다행히 공동체 회원들의 자녀들도 또래가 많아 함께 어울려 지낸다.
작년까지 학교운영위원장을 그가 맡아 시골학교 개혁의 기치를 올려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간의 경험으로 단위학교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제도와 관행을 변화시키는 게 빠른 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산들바다공동체내에 현재 학교를 다니는 자녀를 가진 ‘학부모회’는 변산초등학교와 병설유치원, 변산서중학교 급식에 필요한 유기농쌀을 시중에 유통중인 일반미 가격으로 공급하고 있다. 한살림이 급식용 유기농쌀을 변산초등학교에 일반미가격으로 공급하고 그 차액의 반은 한살림이 부담하고 나머지는 산들바다공동체 학부모회가 한살림에 지불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좋은 밥을 먹이고자 하는 마음들이 모인 탓에 어렵지 않게 경비를 마련할 수 있었단다.
20년 동안 유기농을 하면서 땅을 일궈 온 토박이와 자연을 사랑하고 원해서 귀농한 생산자들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곳, 꿈을 이루는 마포리 만들기가 평생의 소원이라고 말하는 그와그의 가족은 시골살이가 참 재미있다. 그가 만들어가는 세상이 더욱 재미있는 세상이 될 것임을 그들은 알기 때문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농촌의 전형을 지키며 구체적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마을의 그림이 선연하게 그려져 있다. 농민 스스로 만들고 농사짓는 농민의 뜻이 오롯이 살아있는 지역농촌의 미래를 본다. 단아한 내소사의 만리향, 천리향 향기가 이곳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취재 : 이우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