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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교(충주) - 땅이 내가 준 것의 백 배, 천 배 돌려 주었어요
흙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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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21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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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살림 현장농민-서원교(충주)

땅이 내가 준 것의 백 배, 천 배 돌려 주었어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다시 시작했다. 그 나이에도 농사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바닥에서 일어나는 힘, 그는 신앙의 힘이라고 말하지만 땅은 그에게 일할 수 있는 힘과 건강, 그리고 경제적인 것을 함께 주었다. 곤경을 딛고 일어나니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지금 나이 62세. 서원교 선생. 충주 탄금대 부근에서 채소농사를 짓는 선생은 밤 이슥토록 부부가 하우스에서 나올 줄 모른다. 환갑이 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종종걸음으로 정력적으로 일하는 선생의 성림농장에서 어려움을 딛고 다시 자신의 일을 찾기까지 무엇이 선생을 부추겼는지 들어보았다.
비닐하우스 50동, 1만2,000평 농사를 짓는 서원교 선생. 상상할 수 없는 농사규모이지만 부부는 능수능란하게 일처리를 한다. 5억 매출에 1억 소득을 올리는 선생은 작년부터 엽채류에서 양채류로 작목을 전환하고 있는 중이다.
소비자 기호가 서구화 되면서 전반적으로 쌈채류는 잘 안 나갔다. 그래서 쑥갓, 시금치, 청경채를 기본으로 하고 브로콜리, 양상추, 양배추, 생채, 로메인, 롤라로사 등 유럽에서 들여온 품종으로 바꾸고 있다. 몇해 전 유럽여행을 하다가 식당에 올라오는 채소들을 맛보니 독특했다. 한국인 관광객도 많았다. 그 관광객이 우리나라로 돌아와 다시 그 채소들을 찾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쌈채류를 하다 보니 매달 15명의 상주일꾼이 일해 인건비로 거의 다 나가는데 양채류를 하니 품이 훨씬 덜 들어갔다. 재작년 롯데마트에서 양채류 시식회를 했더니 소비자 인기도 높았다. 기호성과 생력화 가능성을 보고 작년부터 밭에 심기 시작했다.
이곳은 주로 시금치를 많이 했다. 시금치 작목반이 처음으로 생겼고 전국 최고의 시금치 단지로 만들었다. 그가 신협 이사장을 할 때였다. 대전, 광주, 부산, 청주 등지로 안 나가는 곳이 없었다. 30여년 전만 해도 이곳은 단양의 낙엽 썩은 것들이 많이 내려와 쌓인 충적토양으로 땅이 기름졌다. 그러다가 농약과 화학비료를 많이 쓰면서 땅도 많이 죽여놓았다. 하우스 개폐기가 없던 시절이라 하우스병도 많이 발생했다. 점차 시금치 소비가 줄자 상추와 엽채류로 전환했다.
농사지은 지는 30년 되었고 친환경농사를 한 지는 한 12여년 되었다. 이곳은 땅부터 살리자는 생각으로 10여년 전부터 발효미생물농법을 도입했다. 우드칩을 구입해 7개월 이상 70도 이상에서 발효시켜 200평 하우스 한동에 10톤 정도 넣었다. 발효되면서 탄닌이나 중금속이 분해되어 질 좋은 퇴비가 되었다. 작년에 농관원에서 안전한 퇴비인가 시료를 분석해 보았더니 그린1급 퇴비보다 증금속이 100분의 1 이하로 나왔다. 선생의 채소들은 전량 충주 롯데마트로 나가는데 퇴비도 전시하여 좋은 퇴비를 쓰고 있다는 것을 소비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었다.
“사람이 농사짓게 하면 안 됩니다. 토양이 농사짓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농산물이 나옵니다.”
선생의 지론이다. 토양에 심겨진 식물에 필요한 것을 넣어주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퇴비라야 한다는 것이다. 농민 자신부터 건강한 농산물을 먹는다는 생각으로 토양을 가꾸어야지 질산염 가득한 해로운 농산물을 만드는 것은 스스로를 죽이는 꼴이라고 덧붙인다. 건강한 농산물에 맛이 길들여지면 소비자 스스로 우리 농산물을 찾을 수밖에 없고 FTA가 되어도 살 길이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선생은 공부도 많이 한다. 방통대 창업농컨설턴트 과정도 나왔고 단국대 유기농 과정을 들으러 부부가 함께 1주일에 한번 천안을 다녀온다. 인터넷으로 정보도 많이 찾고 새로 홈페이지도 준비하고 있다. 공부를 하면서 전체를 보는 눈도 길러졌는데 2~3년내 우리 친환경농업 시장은 큰 변화를 맞을 것으로 진단한다. 중국 남경을 중심으로 코덱스 기준에 적합한 친환경농산물이 대대적으로 생산되고 있어 이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그래도 빈약한 우리 시장이 한꺼번에 무너질 것으로 예견한다. 그래서 선생의 처방은 땅 살리는 것에 집약된다. 지금의 수탈농업인 유기농업은 얼마 못버틸 것으로 본다. 열 개를 땅에 넣고 열다섯 개를 생산하려고 하니 제대로 유기농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생은 밭에는 2년간 우드칩을 하우스 1동에 10톤까지 넣고 2년 후부터는 양을 줄여나간다. 그랬더니 유기물 함량이 40% 이상 나왔다. 유효균이 1그램당 2억마리 이상, 방선균이 4800만 마리 이상 나왔다. 1년에 두 번 이상 우드칩을 100톤 이상 항상 만든다. 국내산 임산물 폐기물로 나온 목재를 파쇄해 쓴다. 꼭 5개월 이상 발효시켜야 독성이 빠진다.
기비로는 퇴비장 바닥에 1미터20 높이로 터널식으로 유박200kg와 쌀겨 20~30kg, 전분가루(미생물 먹이) 5~10kg 효소, 석분(붉은 운무석, 미네랄)을 함께 쌓고 수분 45%를 유지하면서 보온덮개를 덮어놓으면 50~58도까지 온도가 올라간다. 매일 뒤집기를 하여 5번 뒤집으면 5일 후 균이 떠서 누룩냄새가 난다. 손에 퇴비를 쥐었다가 놓으면 흙이 부서질 정도가 되면 그걸 뿌린다.
하우스 1동에는 추비용으로 겨울 동안 보리를 갈아 잘게 썰어 쌀겨와 켜켜이 쌓고 발효균과 물을 채워 액비를 만든다. 보리는 며칠만에도 녹즙이 잘 빠진다. 5일만에 10리터로 10개 이상씩 나온다. 냄새는 꼭 옛날 소여물 구정물 냄새처럼 구수하고 새콤한 냄새가 난다. 그 액비를 200평에 30~40리터 희석해 흙살림 액비 세트 10리터와 혼합해 1주일에 한번 정도 관주한다. 겨울에는 보름에 한번 정도 관주하는데 이튿날 잎 모양이 다르고 뿌리가 왕성해진다. 하우스 헛골은 멀칭을 하지 않고 풀을 키워 곤충의 서식지로 만든다. 그 풀을 봄에 잘라 뒤집어서 호기 발효시켜 3~5일만 지나도 그대로 쓸 수 있는 천혜녹비가 된다. 고농도 유기태질소비료인 것이다. 토양 산소구멍을 많이 생기게 하고 식물의 심근발육을 좋게 하여 새뿌리가 많이 나온다. 영양제는 거의 안 준다.
병충해 방제를 위해 특별한 자재를 쓰는 것은 없다. 식물 자체를 건강하게 키우니 필요가 없는 것. 키토산만 조금 준다. 겨울 지온이 18도까지 올라가니 흰가루가 거의 없다.
선생은 이곳이 고향으로 보리, 수박, 참외 농사를 짓는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농사를 지었다. 초등학교 다니면서는 소 꼴 한 짐 베는 것과 소여물 실어나르는 것부터 배웠다. 소를 풀어놓아도 물 근처에만 안 데려다 놓으면 저녁때 집에 데려와 구정물 한바가지를 다 먹고 소가 살이 쪘다. 중학교 때는 비료가 없을 때라 인분을 구하러 시내로 다녔다.
70년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신협활동을 했다. 신협 이사장을 하면서 신협운동을 통해 농민의 자구노력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참 열심히 했다. 전국 최초로 농자재 판매를 시작했다. 그땐 상인들 농간도 심했고 농약상들의 항의도 많이 받았다. 종자보급도 신협에서 했다. 지역 친환경농업을 태동시킨 계기도 만들었다.
충주시4H 연합회 회장도 맡아 4H 운동도 활발히 했다. 군 제대하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었다. 군대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지역 선교 차원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지역사회운동을 많이 했다. 탄금작목반이 처음 만들어졌는데 충주농협 조합장과 함께 직거래를 해보자고 서울 반포 한신공영아파트 부녀회를 찾아가 직거래를 텄다. 아파트 주부들도 충주에 내려와 농장을 둘러보기도 했다. 그땐 당근, 수박, 파, 시금치가 주작목이었는데 단지화 하였더니 전국에서 인기가 좋았다.
선생은 40대에 어린 학생들과 함께 신학을 다시 공부했다. 월악산 국립공원 안에 수련원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정립된 신학 사상을 갖고 시작하자고 신학을 공부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땅 문제로 수련원은 포기하고 칠금동 교회 신축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고 빚으로 고생하던 동생에게 자신이 부치던 밭까지 다 내주고 그는 외상으로 파이프를 얻어다가 다시 농사를 시작했다. 빈손으로 다시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믿는 하느님이 존재하는지 삶을 통해 느껴보자는 생각으로 땅을 다시 일궜다.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보여주자는 오기도 생겼다. 힘들어도 매년 수익의 30%는 땅으로 다시 재투자했다. 채소 가격이 떨어질 때는 힘들었다. 곤경을 딛고 일어나니 매사 삶이 긍정적으로 바뀌었고 작은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지금 매출 5억 가까운 규모로 성장했다. 확실한 소비자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이것만은 꼭 먹어야겠다는 소비자를 갖기 위해 일부러 까다로운 생산조건을 만든 롯데마트에 납품을 시작했다.
“앞을 내대보고 진득하게 가야 합니다. 너무 조급하게 돈만 쫓아다니면 안 됩니다. 농사도 분기점이 있으니 그때를 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선생은 늘 부인 전수연(61) 씨와 함께 다니고 일한다. 남자는 큰 덩어리를 보면서 일하고 여자는 세심한 관찰을 할 수 있으므로 농사는 꼭 부부가 함께 해야 힘이 안 든다고 강조한다. 흙살림에는 토양분석과 농산물 농약분석을 위해 자주 방문한다.
달천강유기영농조합 회장으로 있고 창립 준비 중인 흙살림 충주달천지회 고문으로 있다. 1남3녀를 두었는데 큰딸은 목사인 남편과 결혼해 서울에서 동생들과 함께 기획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자신의 농장 농산물로 밥상을 만들어 먹는 것이 건강비결이라고 말하는 선생은 땅을 살려 놓으니 땅이 주는 것이 백배, 천배는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 조금 힘들어도 땅을 살리는 일, 땅에게 되돌려주는 일을 어찌 아끼랴. 이제 또 선생의 삶이 시작된다. 지역을 위해, 농업, 농촌을 위해 선생이 청년기처럼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기 때문이다. 두고두고 후회 않을 농민의 삶, 그에겐 정년이 없기 때문이다. <취재 : 이우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