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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 원로에게 듣는다- 서순악 영동여성농업인센터 대표
흙살림 조회수 564회 14-12-3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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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에게 듣는다 - 서순악 영동여성농업인센터대표
 
“난 염세주의자였다. 하지만 논이 나를 염세주의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었다.”
충북 영동에서 여성농업인들을 위해 애쓰고 있는 서순악(69) 대표가 우스운 이야기를 건네겠다며 말씀하신 첫마디다. 하지만 30대 젊은 나이의 여성이 연고도 없는 시골로 내려와 농사를 짓게 된 사연부터 지금까지 일구어온 농장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가벼운 농담거리가 아니었다. ‘그대가 나’임을 깨우치게 만든 서 대표의 농사 이야기를 들어본다.
 
■ 고통 속에서 희망을 보다
서 대표는 중학교 졸업 후 5년이 지나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또 스스로 돈을 벌어 진학하면서 늦깍이 대학생이 됐다. 대학원은 35세가 되어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 사회가 부정부패가 만연한데다 사상 투쟁이 격렬하게 일어나자 염증을 느껴 대학원 등록금을 가지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충북 영동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등록금으로 897평의 땅을 구입했다. 논 400평에 트럭 60대 분량의 산에 있는 풀을 모아다 집어넣었다. 나머지 397평 포도밭에는 낙엽이란 낙엽을 다 긁어모아 뿌렸다.
그리고 첫해 농사를 시작했다. 논에 엎드리면 벼 잎에 눈을 찌르고 팔을 긁히고, 산 풀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당시 염세주의자였던 서 대표는 이 고통 속에서 벼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내가 이만큼 노력하는데 네가 잘 살아남아 영글지 않으면 난 대망신이다’면서 다독거리며 농사를 지은 것이다. 그때 생각으로 첫해 농사를 실패하면 다시는 농사를 짓지 않을 결심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풍년이 들었다. 400평 논에 10가마니(가마니 당 80㎏) 넘게 생산했다. 이 경험이 서 대표를 염세주의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었다. 희망이 있는 고통은 그저 고통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천당으로 가는 길 또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 힘이 들어도 유기농이다
서 대표가 영동으로 내려올 때 들고 온 책이 있었다. 바로 일본의 여류작가 아리요시 사카와가 쓴 <소설 복합오염>이라는 책이다. 식품공해 및 각종 공해 상황을 파헤친 보고서로 농약과 식품 첨가물의 위험성과 유기농업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을 읽은 영향이기도 하지만 애시당초 서 대표에게 농사는 모두 유기농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은 농산물을 먹고 다른 사람이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질 방법이 없기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서 대표의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1980년대 초반엔 포도가 귀한 과일이었다. 임산부나 환자들이 먹던 것이기에 건강하게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산한 유기농 포도는 백화점에 유통됐다. 처음엔 무시하던 사람들던 이것을 지켜보면서 유기농법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풀을 베고 벌레를 일일이 손으로 잡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뒤돌아서면 또다시 자라는 풀과 땅 속에서 기어나오는 벌레들 탓에 허리 한 번 펼 짬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무릎 연골이 다 닳아졌을까. 그래도 부직포를 쓰게 되고 흙살림에서 친환경 자재를 만들면서 농사짓는게 한결 쉬워졌다.
 
■ 가공사업에 도전하다
건강한 포도를 생산하기 위해 애를 쓰던 중 1995년 WTO(세계무역기구)가 설립될 거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렇게 되면 포도 수입도 늘어나 농사가 힘들어질 거라 예상하고 1993년에 가공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10년이 넘게 쌀을 선물했던 논에 공장을 지으려 시멘트를 부을 때는 눈물도 흘렸다. 공장이 지어진 이듬해 포도 10㎏에 13,000원으로 계약하고 가공에 들어가려했는데 시세가 8만원까지 치솟았다. 농가로부터 포도를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된지라 첫해 가공을 포기해야만 했다. 둘째 해부터 조금씩 포도 가공을 시작하면서 늘려가던 중 마을에 축사가 생겨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서 대표는 우여곡절 끝에 공장을 다른 이에게 양도하게 됐다.
그 뒤론 주위의 귀농인들이 어린이집을 짓고 원장을 맡아 달라고 해서 2년간 원장 생활을 지내기도 했다. 이 경험은 여성농업인센터에서 어린이집을 짓고 운영하는 힘이 되었다. 하지만 최근엔 어린이집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을 찾기 힘든 시골의 안타까운 현실이 이곳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는 것이다.
 
■ 이만큼이면 잘 살았다
농사라는 게 결코 혼자서 잘 짓는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농산물을 유통하고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과 한 마음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서 대표는 “소비자는 잎이고, 실무자는 줄기며, 생산자는 뿌리”라는 표현을 쓴다. 모두가 한 나무 안에 사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잎이 자기 잎에만 영양을 저장하면 단풍이 들어 떨어져버리고, 뿌리가 잎에 영양을 주지 않고 자기만 영양분을 섭취하려 하면 썩어버리며, 줄기도 양분을 오르락내리락하지 않고 자기만 챙기면 혹이라는 암이 생겨 죽게된다는 것이 서 대표의 생각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유기체라는 걸 깨우치고 서로 위하고 격려하고 다독거릴 때 행복할 수 있다.
그래서 서 대표는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도농교류도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농민의 뼈를 갈아서 소비자를 먹이는 것이다. 도농교류란 농사가 힘들다는 것을 배우는 장이다. 단지 수확의 기쁨만 체험하는 것은 안된다.”
서 대표는 현재 1,500평의 밭에 야생화를 키우고 있다. 농사짓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산새가 풍경을 치고, 다람쥐가 나무에서 장난치고, 도롱뇽이 개울에서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천하태평이다. 더군다나 나의 정성으로 남이 행복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행복하다. 내가 최선을 다하면 남도 나에게 정성을 다한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대가 바로 나임을 지금부터라도 믿어보세요.” 글 이방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