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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서양과학을 특징짓는 것은 무엇일까? 아인슈타인은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양과학의 발전은 두 가지의 위대한 업적, 곧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한 [유클리드 기하학에서의] 형식논리학적 체계의 발명과 [르네상스기에] 체계적 실험에 의해 인과관계를 규명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의 발견에 기초하고 있다”(그레이엄, ?중국, 유럽 그리고 근대과학의 기원?, 김영식 편, 『역사 속의 과학』에서 재인용).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일이 중국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아니라,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형식논리학과 인과관계보다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실험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의 전근대에서도 형식논리학이나 인과관계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흔히 동아시아의 전근대 수학에 대해 말할 때 기하학이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 니담은 중국의 수학은 기하학적이기보다는 항상 대수적이었다고 말한다(조셉 니담, ?중국 과학전통의 결함과 성취?, 김영식 편, 『중국 전통문화와 과학』). 니담은 그 원인이, 중국에서는 원형原型의 파동이론에 충실했고 원자에 대해서는 줄곧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클리드의 『기하원본』이 한문으로 번역된 것은 1607년이었다. 기하학은 계량이라는 개념과 연관된다. 곧 대상의 구체성을 없애고 대신 양量, 그것도 추상적인 양만을 문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전근대에 기하학이 없었다는 말은 곧 동아시아의 전근대에서는 추상적인 양만을 문제 삼은 적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기하학이 발달하게 된 것은 이집트의 기하학이 그리스로 전해져 연역법과 결합하면서부터였다. 귀납법이 구체에서 추상으로 나아가는 논리라고 한다면 연역법은 추상에서 구체로 나아가는 논리다(이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대립으로도 볼 수 있다). 연역법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체계화된 이후 서양의 논리는 대개 이를 따랐다. 그러나 베이컨은 연역법이 증거들을 왜곡하는 막다른 골목이라고 생각하여 반대했다. 그에게 연역법은 ‘먼저 자기 마음대로 질문을 설정하고는 경험을 자기 편한 대로 왜곡시켜 자신의 결론에 찬성하게 만드는’ 방법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귀납법이야말로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었으며 이는 가설, 실험, 결론의 3단계로 되어 이후 근대 서양과학의 기본적인 방법으로 자리 잡게 된다.
실험이 시작되기 위한 가설은 하나의 규정이다(그러나 노자는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라고 하여 자의적인 규정을 반대했다). 더군다나 그 가설은 가설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모든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Ceteris Paribus). 실험 대상의 원자적 상태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대 그리스의 전통을 따르면 대상 곧 현실은 진짜가 아닌 ‘가상의 것’이라는 점 역시 전제되어 있다.
추상은 구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구체는 추상을 통하여 하나가 된다(보편성의 획득). 그러므로 이러한 방법들은 대상을 보다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기하학이나 실험은, 출발은 구체에서 출발했지만 결국은 구체를 배제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하향). 따라서 기하학이나 실험은 다시 구체로 나아가 현실성을 얻어야 한다(상향). 이 과정이 없이는 기하학이든 실험이든, 연역이든 귀납이든 모두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수학은 수와 크기와 모양을 연구하는 과학이다. 이는 모두 구체가 배제된 추상 차원의 논의다. 특히 수학은 이들을 마치 원자처럼 고립된 것으로 추상화시켜서 모든 사물을 양으로 환원시킨다(무한無限이라는 난제는 이런 전제에서는 필연적인 것이다).
초기 노예제 사회에서 기하학은 이집트와 같이 강의 범람에 따른 토지의 측량, 세금의 징수를 위한 토지의 측량에 필요한 것이었으며(동아시아에서 우공禹公의 치수사업에 기하학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의 치수사업과 구주九州의 확정이라는 경지 정리 작업 역시 세금을 걷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범람의 시기를 예언하고 이후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지배계급의 권력에 의해 신비화되었다. 다시 말해서 고대 그리스에서 수학은 다른 과학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자연을 개조 변혁하는 수단을 제공해 주는 원리가 되었지만, 동시에 과학은 자연을 사람에게 유용하게 종속되도록 만들었고(안재구, 『수학문화사』1) 나아가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한 것으로 발전하였다. 근대 과학도 마찬가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근대 과학으로 이끈 사회 과정에서 유일한 의식적 목표는 자본주의적 이윤(그레이엄)이라는 점뿐이었다.
박석준(흙살림 동일한의원 원장, 동의과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