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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물질은 일정한 가치가 있다. 그 가치는 무언가에 쓸모가 있다는 의미에서의 가치다[사용가치]. 쌀은 먹어서 배를 불리는 쓸모가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며 옷은 입어서 추위나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쓸모가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쓸모가 없음에도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돈이다. 돈 자체는 먹을 수도 없고 입을 수도 없다. 그러나 그 돈으로 쌀과 옷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돈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교환가치]. 이는 가상의 가치다. 실제로는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물론 이렇게 가치를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나눌 수 있는 것은 물질을 질質과 양量으로 나누었기 때문이다. 질이나 양이라는 개념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어서 현실의 물질은 엄밀한 의미에서 질과 양으로 나뉠 수 없다. 질과 양 역시 가상이며 실제로 그런 것은 없다. 이러한 가상의 대상을 분석하는 방법이 형식논리학이다. 형식논리학에 의하면 질은 질이고 양은 양일뿐이다(A=A). 그러므로 형식논리학에서는, 양이 많건 적건 양은 양일뿐이어서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모든 양에는 질이 들어 있고 질에는 양이 들어 있다. 이는 마치 시간은 공간 속에서 흐르고 공간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공간이 없는 시간, 시간이 없는 공간은 우리의 의식 곧 가상 속에서만 있을 수 있다. 가치 역시 그러하다. 모든 물건에는 교환가치와 사용가치가 있지만 실제 우리가 어떤 물건을 서로 주고받을 경우, 곧 교환을 할 때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동시에 갖고 있는 물건 자체를 주고받는 것이지 사용가치만 주고받거나 교환가치만 주고받을 수는 없다. 이는 어떤 물건에서 양을 배제하고 질만 주고받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나누어 생각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돈이라고 하는 매개다.
돈은 어떤 물건이 갖고 있는 사용가치를 배제하고 교환가치만 분리시켜 그 가치를 표시하는 것이다. 교환가치는 교환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쓸모가 없다. 그러나 쓸모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놀랄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쓸모가 있는 것은 대부분 쉽게 사라진다. 쌀이 그러하고 옷이 그러하다. 그러나 교환가치를 사용가치로부터 분리하면 부를 거의 무한대로 축적할 수 있게 된다. 돈은 썩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 좋은 것은 돈은 쌀이나 옷만이 아니라 더 다양한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점이다. 욕망의 크기만이 아니라 대상도 넓어졌다.
이런 분리가 일어나는 곳에서는 교환이 실현되기 위한 장치, 곧 시장이 있어야 한다. 시장에서 교환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웅변이나 수사학이 필요하다. 그러나 설득이나 때로는 사기, 협박이나 폭력에 의해서는 교환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 교환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등가교환이 필요하다. 서로 다른 사용가치를 갖고 있고 따라서 서로 다른 교환가치를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주관적인’ 물건을 교환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객관적으로’ 교환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과 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했다(아리스토텔레스, 『동물지』). 그래서 과학을 포함하여 철학은 아고라라고 하는 시장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과학과 철학은 등가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등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물질의 질적 측면은 배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감성에 기초한 것이며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을 양과 질로 나누고 그 중에서 양만을 문제로 삼기 위해서는 감성을 배제하고 이성에 의해서만 물질을 파악해야 한다. 감성과 이성 역시 가상의 것임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곳에서는 물질의 이성에 의한 양적 파악이라는 것만이 유일한 과학과 철학이 되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물질 역시 물질과 비물질(정신)이 나뉜 것, 비물질이 배제된 것으로서의 물질이며 다른 물질과의 연관이 배제된 고립되고 독립적인 물질, 곧 원자였다.
이것이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하나의 길(이를 편의상 그리스적 형태라고 하자)인데 동아시아와 다른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이런 길을 택하지 않았다(이를 편의상 동아시아적 형태라고 하자).
동아시아의 고대에는 인평人平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인평은 물물교환에서 일어나는 다툼을 조정하는 사람(또는 기관)이었다. 서로 다른 교환가치를 주장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공정한’ 교환을 하게끔 조정하는 사람이다. 인평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사람은 심정心正, 곧 심장은 물론 다른 장기도 곧게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삿된 마음으로 남의 것을 잘 훔치며 말을 잘 뒤집는다(“五藏皆偏傾者, 邪心而善盜, 不可以爲人平, 反覆言語也.” 『靈樞』 ?本藏第四十七?). 여기에 등가라는 개념은 없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물건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등가라는 개념이 필요 없었고, 필요한 것은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뛰어나다[賢] 하고 그래서 사람 들이 편안해 지고 기존의 사회 질서가 유지되게 되면 그런 사람을 인仁하다고 하며 그래서 좋은 결과가 나와 누군가 혜택을 입게 되면 덕德이 있다고 했다.
이런 사회에서는 등가라는 개념이 없었고 당연히 교환가치라는 개념도 없었다.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갔지만 여기에서는 양과 질의 분리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전제가 되는 감성과 이성의 분리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질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모든 물질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이렇게 이해된 물질을 기氣라고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물질은 다른 물질과의 관계 속에서 늘 관계 맺으면서 운동하고 있기 때문에 기는 물질 자체가 아니라 그 물질이 다른 물질과 관계를 맺어 힘을 드러낼 때, 곧 자기를 실현할 때 이를 기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동아시아적 형태에서 감성과 이성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기를 아는 방법은 이성에 의한 객관적인 양적 분석이 아니라 기를 느끼는 방법, 곧 감응感應의 방법이다. 감응은 대상을 기로 보았을 때, 우주 안의 인간을 포함한 개별적 사물이 어떻게 움직이고 관계를 형성해가는지에 대한 개념이다. 이는 인과적 질서가 아니라 모든 사물이 보편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면서 상호 반응하고 그것이 일정한 패턴을 갖고 움직이는 자연의 질서다(김희정, 『몸 국가 우주 하나를 꿈꾸다』).
글 박석준(흙살림 동일한의원 원장, 동의과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