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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혼돈의 세계를 인류의 탄생에서부터 신석기 이전, 주로 구석기시대일 것으로 가정한다. 그렇다면 혼돈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석기 시대의 사회와 생활양식을 보존하고 있는 현존하는 원주민에 대한 정보가 중요하다(이하의 내용은 주로 마셜 살린스, 『석기시대 경제학』을 재구성한 것이다).
질서의 세계와 달리 혼돈의 세계에서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지 않다. 이는 수렵과 채집이라는 경제구조와 관련이 있다. 수렵과 채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동을 해야 한다. 수렵 채집 사회에서는 이동 자체가 가장 중요한 생산력이다. 물과 식량을 찾아 계절에 따라 이동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정착해서는 안 되고 많은 것을 가져서도 안 된다. 이들은 먹고 사는데 필요한 대부분의 원자재가 풍부하게 널려 있기 때문에(적은 인구와 이를 유지하기 위한 여러 장치, 예를 들면 노인이나 영아살해가 이를 가능하게 한다) 잉여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항구적인 저장수단도 발달시킬 필요가 없었다(이들은 저장기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혼돈의 세계에서 잉여는 ‘매우 부담스러운 짐’이며 나아가 생산력을 저해하는(이동을 방해하는) 요인일 뿐이었다. 따라서 잉여에 대한 욕망은 공동체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반사회적인 요인일 뿐, 무한히 커질 수도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가진 것이 적을수록 더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고 부서진 것은 그때그때 대체하거나 빌리면 그만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떠한 물질적 소유에도 관심이 없다. 아무도 부를 얻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는다. 이들의 극히 제한된 물질적 소유로 인해 이들은 일상적 필요와 관련된 모든 걱정에서 벗어나 인생을 즐긴다.
욕망이 적기 때문에 혼돈의 세계는 물질적 압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람들은 일종의 물질적 풍요 속에서 살고 있었다. 특히 비생계 부문에서의 욕망은 더욱 쉽게 충족된다. 이는 비생계를 위한 물품을 생산하기가 쉽고 무엇보다도 소유가 민주적이기 때문이다.
혼돈의 경제는 분명 낮은 단계의 것이었다. 그러나 혼돈에서의 소비는 문화적으로 가장 적합한 선에서 정해졌기 때문에 이들은 누구나 쉽게 만들 수도 있는 물건을 훌륭한 재산이라고 여기며 만족한다.
혼돈의 세계에서는 대부분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식량의 획득과 준비를 위한 1인당 1일 평균 노동시간은 대개 2, 3시간 많아야 4, 5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일하는 것도 아니다. 하루 이틀 일하면 하루 이틀은 쉰다. 심하게는 몇 달을 쉬기도 한다. 나머지 시간은 휴식을 취하거나 이웃에 놀러가거나 이웃을 접대하는데, 특히 춤을 추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들은 지속적인 노동을 혐오한다. 욕망이 적기 때문에 목표가 소박하고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그것을 달성할 수 있어서 이들은 생계 문제로부터 아주 쉽게 해방될 수 있으며 과도하게조차 보이는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혼돈은 여가를 누리기 위해 신석기 혁명을 거부한다. 이는 인류의 오랜 삶을 통해 얻은 지혜이다. 지금도 어떤 원시 부족은 농경민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농경을 도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농경으로 전환하면 힘든 노동을 너무 많이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농경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노예노동이다. 바이블에서도 최초의 죄인인 카인은 경작자이다.
이들이 수렵과 채집경제 구조를 유지하는 한, 정착은 식량을 구하기 위한 이동 거리를 점점 넓혀야 하기 때문에 노동 생산성이 떨어진다. 수확이 떨어진다. 권위를 나타내는 옷이나 장신구, 견고한 집과 같이 필연적이지 않은 물품의 소유는 부담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들은 오늘날 인간의 눈에는 매우 ‘금욕주의적’으로 보이는 관념을 갖게 된다. 이들은 최소한의 도구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고 그 중에서도 작은 물건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며 어떤 물건이든 둘 또는 그 이상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혼돈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고 영원한 현재만을 지향한다. 따라서 물자를 절약하지 않으려 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낭비벽이 심한 것처럼 보인다.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가도 운 좋게 짐승 서너 마리를 잡으면 곧바로 이웃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인다. 마침 접대 받는 쪽에서도 짐승을 잡게 되면 그들도 잔치를 벌인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이 마을 저 마을로 옮겨 다니며 며칠 동안 잔치를 벌이는 경우도 있다. 다시 이동해야 하고 별다른 저장수단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잔치는 이들의 사회적 의무다. 또한 내일도 또 다른 잔치를 할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도 이런 잔치를 풍성하게 만든다. 이 믿음 역시 막연한 것이 아니라 오래된 과거로부터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에서 오는 것이다.
잔치는 소유가 아닌 나눔이다. 또한 축적이 아닌 낭비이다. 넉넉한 식량이 생겼는데도 잔치를 벌이지 않는다는 것은 공동체의 이익에 반反하여 축적한다는 말이다. 사회적 존경을 포기하고, 도덕적 의무를 저버리고 사적으로 숨기는 것이다. 은닉죄에 해당한다.
이러한 은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축적을 위한 저장’이라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저장은 물건을 특정한 고정된 장소에 가두어 두는 것이다. 저장하기 위해서는 한 곳에 정착해야 한다. 그러나 정착하게 되면 그 지역의 풍부했던 ‘자연의 창고’는 조만간 고갈될 것이다. 기존의 수렵과 채취라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 한 곳에 정착하는 순간 공동체는 파괴된다.
잔치는 잉여의 축적이 가져올 재앙, 곧 같이 잔치를 벌이지 않는 자들,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자들, 은닉한 잉여를 갖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자들을 미리 없애는 장치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잔치는 잉여의 축적, 나아가 농경과 같은 ‘생산력의 발전에 대한 공포’를 반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잔치와 놀이(휴식)는 적은 욕망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다. 노자老子 역시 욕망을 줄이라고 했지만 노자에게는 이런 장치가 없었다. 대신 노자에게는 ‘작은 나라’[소국小國]가 있었다. 그것은 혼돈이 아니라 질서의 세계다.
이상의 논의에서 빠진 것이 있다. 하나는 이동 자체이며 다른 하나는 혼돈의 세계에서 물질을 주고받는 행위, 곧 경제다. 이동은 무작위적으로 아무 곳으로나 가서는 안 된다. 이동을 위해서는 하늘과 땅(천문지리天文地理), 동식물과 사람의 몸과 같은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혼돈의 세계에서 자연에 대한 이해는 어떤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혼돈의 세계에서 전해져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인류의 유산, 곧 농업과 의학, 장인의 기술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글 박석준(흙살림 동일한의원 원장, 동의과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