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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에 길을 묻다<12>혼돈의 세계 1
흙살림 조회수 469회 19-01-10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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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에 길을 묻다 012 혼돈의 세계(1)

 

 

혼돈의 죽음은 곧 시간과 공간의 탄생을 뜻한다. 그 시간과 공간은 자연으로서의 시공이 아니라 인간의 질서에 의해 구획된 시간과 공간이다. 이에 비해 혼돈의 시공은 뒤섞여 있는 시공이다.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지도 않으며 따라서 역사도 없고 문화도 없다. 혼돈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로 존재하며 인간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도는 항상 무심하며 만물은 다 스스로 그러할 뿐이다. 곧 자연自然이다(탕샤오펑, 『혼돈에서 질서로』).

혼돈의 세계는 원시사회이며 한 마디로 말하면 국가가 없는 사회다. 국가가 없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외적 강제, 곧 권력을 행사하는 폭력기구가 없다는 것이며 경제적으로는 잉여를 위한 시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적 강제를 고정시키기 위한 문자가 필요 없고, 잉여를 축적시키지 않기 때문에 역사가 필요 없으며,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욕구만 충족시키려 하기 때문에 문화가 필요 없다.

인류는 오랜 동안 국가가 없는 사회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살고 있는 원시사회에는 국가가 없다. 지금 남아 있는 원시사회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그 사회를 조정하는 추장이 존재하지만 추장은 평화의 중재자일 뿐이다. 추장의 임무는 그 사회의 평화와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전쟁의 경우에는 전쟁에 뛰어난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데, 그 사람이 반드시 추장일 필요는 없다. 추장이 전쟁에 나설 경우, 전쟁이 끝나면 추장에게 주어졌던 절대적 권력은 없어진다. 둘째로 추장은 그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을 착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반대로 구성원들의 끊임없는 요구에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주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추장은 다른 누구보다 소유물이 적고 가장 초라한 장식물만 지니게 된다. 구성원들의 요구를 거부하면 이는 곧 추장이 추장인 이유를 거부하는 것이다. 더 이상 추장일 수 없다는 말이다. 추장의 인기는 그가 얼마나 관대한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추장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 셋째로 원시사회의 구성원들은 추장의 말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말솜씨는 정치권력의 조건이자 수단이다. 많은 부족들에서 추장은 매일 교훈적인 말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이때의 주제는 대개 평화와 조화, 그리고 정직이라는 미덕에 관한 것과 전통을 따를 것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추장은 ‘말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말하는 사람이 곧 추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추장에게 기대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쉽게 그 추장을 버리고 다른 추장을 내세운다. 그런 추장에게 주어지는 반대급부는 대부분의 부족에서 추장에게만 엄격히 적용되는 일부다처제다. 그래서 추장은 어떤 의미에서 여성을 매개로 한 집단의 포로라고까지 말하는 것이다(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추장과 부족민 사이의 관계가 교환가치에 바탕을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정치권력을 집단으로부터 추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사회는 정치권력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무능력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권력의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데 놀랍도록 능숙했던 것이다. 그들은 권력의 추월성이 집단에 치명적인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외재적이고 스스로 정당성을 창출하는 권위라는 원리가 문화 자체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이다(『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이러한 원시사회가 존속할 수 있는 조건의 하나는 적은 인구다. 인구의 증가는 권력의 탄생을 부추긴다. 인구의 증가가 생산력의 발전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원인이 있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국가가 없는 사회는 의식적이든 아니든 인구를 조절하는 나름의 장치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조건은 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가 아닌 ‘여럿’이라는 점이다. ‘하나’는 문자로 고정된 법이며 그것은 결국 국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원시사회에서 추장은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이를 통해 공자가 왜 그토록 심하게 교언(巧言. 교묘한 말)과 영언(?言. 아첨하는 말)을 거부했는지 알 수 있다. 말을 잘하는 것은 추장, 곧 무巫였기 때문이다. 공자의 교언에 대한 반감은 무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을 국가의 새로운 변혁 세력으로 정립하려 했던 유儒 또는 사士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반면에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작은 나라와 적은 백성)이라는 주장은, 국가는 인정하지만 작은 국가와 그 국가의 인구가 적어야 한다는 절충적인 사고를 보여준다(노자가 혼돈 신화의 나라인 초나라 출신으로 질서의 나라인 주나라에서 벼슬을 했다는 말이 전해지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비록 공자는 ‘하나’를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공자의 인의仁義나 예악禮樂에는 이미 후대에 법가로 발전하는 ‘하나’의 모티브가 들어 있다. 노자는 ‘하나’를 반대했지만 그의 자연과 도에는 역시 ‘하나’의 모티브가 들어 있다. 공자나 노자 모두 암묵적으로 국가를 전제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혼돈이 아닌 질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를 부정하고 혼돈의 세계를 말한 것은 양주楊朱와 초나라의 장자였다.

박석준(흙살림 동일한의원 원장, 동의과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