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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에 길을 묻다<9> 맹자의 승리
흙살림 조회수 504회 18-10-0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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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에 길을 묻다 <9> 맹자의 승리


 

비판은 대상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를 위한 것이다. 진정한 비판은 대상의 문제=모순을 발견하여 그것이 외부의 힘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서도 파괴되는 자기 파멸의 논리를 찾아 낼 뿐만 아니라(부정적 측면), 비판이 되는 대상이 갖고 있는 합리적 핵심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긍정적 측면). 그리하여 대상에 대해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지침을 줄 수 있어야 진정한 비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직접 비판에 참가한 사람만이 아니라 비판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이런 자세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동안 2천 년 이상 수많은 사람들이 고자와 맹자의 논쟁을 보아왔지만 이런 자세를 보여준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네 번째 논쟁

 

고자가 말한다. “먹는 것[食]과 섹스 하는 것[色]이 사람의 본성이다. 인仁은 내적인 것이지 외적인 것이 아니며 의義는 외적인 것이지 내적인 것이 아니다.”

맹자가 말한다. “어찌하여 인은 내적이고 의는 외적이라고 하는가?”

고자가 말한다. “[밖에 있는] 저 사람이 어른이므로 내가 그를 어른으로 공경하는 것이지 내 안에 그를 어른으로 여기는 마음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흰 저 것을 희다고 하는 것은 밖에 있는 그것의 색에 따라 희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외적인 것이라고 한 것이다.”

맹자가 말한다. “흰 말의 흰색은 흰 사람의 흰색과 다를 바가 없겠지만, 아무리 모른다 해도 나이든 말을 공경하는 것과 나이든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또한 나이가 의義인가 아니면 나이든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 의인가?”

고자가 말한다. “내 집안의 아우라면 아끼고 진나라 사람의 아우라면 아끼지 않는다는 말은 ‘나’를 중심으로 말한 것[悅]이다. 그러므로 [인은] 내적인 것이다. 초나라의 나이든 사람도 공경하고 내 집안의 나이든 사람도 공경하는 것은 ‘나이’를 중심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의는] 외적인 것이다.”

맹자가 말한다. “진나라 사람이 불고기를 좋아하는 것이나 내가 불고기를 좋아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다른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불고기를 좋아하는 것도 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고자는 사람의 본성은 먹는 것과 섹스 하는 것, 곧 생존과 번식뿐이라고 말한다(이 구절은 진화론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먹는 것은 개체로서의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섹스는 유적類的 존재로서의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적 존재’라는 말은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사람의 무리[類]라는 뜻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의 사람이라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사람의 무리라는 뜻을 포함한다(홍기빈,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이러한 성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실현된 것을 인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배가 고파서 음식 먹는 것을 인이라고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 지를 규정하는 것은 의이다. 그러므로 고자에게 인은 내적인 것이고 의는 외적인 것이다. 배가 고파서 쌀밥을 먹을 수도 있고 고기를 먹을 수도 있지만 먹어서 배고픔을 없앤다는 점에서 그것은 모두 인이며 나의 본성에 따른 행위이므로 내적인 것이다. 이에 비해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할 지, 먹지 말아야 할 지를 규정하는 것은 의이다. 그러므로 이는 외적인 것이다.

고자는 이를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나이가 많다는 것과 나이가 많은 것에 대한 태도의 관계를 들어 설명한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그 나이든 사물이 나의 밖에 있는 것처럼 분명하게 외적인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사물에 대해 공경하게 대하는 것은 내 안에서,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내적인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고자는 내외의 문제를, 대상이 밖에 있기 때문에 외적인 것이고 그 대상에 대해 느끼는 내가 안에 있기 때문에 내적인 것이라는 식으로 말함으로써 마치 대상 자체가 의인 것처럼 말한 것이 되었다. 이는 의라는 것이 대상과 나의 관계 속에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상과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나와의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맹자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한다. 맹자의 관점에서 볼 때 똑같이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말과 사람에 대한 태도가 같지 않은 것(또는 같지 않은 것)은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한 고자의 반박은 맹자의 비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고자는 이를 나와 대상의 관계의 문제로 다시 확대 해석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여전히 고자에게 의는 외부의 대상과 같을 뿐이다. 그것도 대상과 대상에 대한 사회적 태도의 차이를 무시한 채로.

맹자는 자신의 논지를 확신할 뿐만 아니라 이를 확대 해석하여 앞의 논쟁에서 보여준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곧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동일시하여 어떤 사람이 불고기를 좋아한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사람이 좋아한다는 전체판단으로 나아가며 그것은 사람이 본래 타고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사실판단에서 곧바로 가치판단으로 나아가는 오류를 다시 반복한 것이다.

고자에게 인은 무엇보다도 대상을 아끼는 것[愛]이다. 이는 고자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연이나 사회에서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유적 존재로서의 사람일 뿐이다. 고자에게는 이러한 사람에 대한 인식이 빠져 있는 것이다. 맹자는 이를 정확하게 보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후대의 동의와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고자는 맹자와의 논쟁에서 별로 얻은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반면에 맹자는 자신의 사회적 관점에 대한 확신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맹자』라는 책에는 더 이상 고자의 반박이 없기 때문에 고자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맹자는 고자와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이론과 입장을 정립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그동안 보았던 것처럼 맹자의 비판은 올바른 비판이 아니다. 그것은 변증법적 논리학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형식논리학적으로도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퀑로이슌, 『맨 얼굴의 맹자』와 양쩌보, 『맹자의 성선론 연구』 등 참조). 그럼에도 맹자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사상도 비판을 통해 변화하지 못하면 소멸할 수밖에 없다. 맹자는 고자와의 논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의 발견이었다.

박석준(흙살림 동일한의원 원장, 동의과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