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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교언영색巧言令色, 그 중에서도 교언을 특히 싫어한 이유는, 논쟁이나 웅변의 목적이 상대를 이기거나 감동시키는데 있어서, 말하는 사람은 가능하면 본래의 쟁점에서 멀리 떨어지려 하거나 감정과 편견에 호소하는 경향이 강하며, 의견을 깊이 분석하기보다는 산뜻하고 재치 있는 말을 구사하려 한다. 그 결과 논쟁이나 웅변은 대개 문제의 핵심을 벗어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크릴, 『공자, 인간과 신화』). 대화는 상대를 설득하거나 승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의 관계에서 생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언은 문제를 풀기보다는 상대를 이기거나 설득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그렇게 말 잘하는 사람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믿음이나 생각을 절대 바꾸지 않기 때문에(“唯上知與下愚不移.” ?陽貨篇? 17.3) 자신도 배울 기회가 없어져 버린다는 점이다.
세 번째 논쟁
고자가 말한다. “타고난 [대로 살아가는] 것을 성이라고 한다(生之謂性).”
맹자가 묻는다. “타고난 것을 성이라고 하는 말은, 희게 타고난 것[白之]을 희다고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인가?”
고자가 답한다. “그렇다.”
맹자가 말한다. “그렇다면 흰 깃털의 흰색과 흰 눈의 흰색이 같고, 흰 눈의 흰색이 흰 옥의 흰색과 같다는 말인가?”
고자가 답한다. “그렇다.”
맹자가 말한다. “그렇다면 개의 성이 소의 성과 같고 소의 성이 사람의 성과 같다는 말인가?”
앞의 두 논쟁에서는 버드나무와 물을 예로 들었다. 버드나무 논쟁에서 맹자는 인의仁義가 내적인 것임을 주장했고(그래야 구부려도 버드나무를 해치지 않을 수 있다), 여울물 논쟁에서는 성性이 선善한 것임을 주장했다(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성은 선한 것이다. 또는 선해야 한다). 그래서 세 번째는 사람의 성 자체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먼저 고자는, 희게 타고 나든 검게 타고 나든 타고난 대로 살아가는 것이 성일뿐, 희거나 검다고 하여 그것을 선악으로 나눌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맹자는, 서로 다른 사물의 흰색을 모두 흰색이라고 한다면, 그 흰색은 그것이 바로 성이기 때문에 어떤 사물이든 희기만 하면 그것은 같은 성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성과 개돼지의 성은 같은 것이 된다고 말한다. 이 논쟁을 통해 우리는 전형적인 교언의 예를 본다.
‘흰 깃털의 흰색’에서 ‘흰 깃털’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물의 특수성이다. 이에 비해 ‘흰색’은 개별적인 사물의 특수성에서 추상해서 얻은 보편성이다. 예를 들어 사과는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빨간 사과가 있는가 하면 파란 사과도 있다. 이 세상의 어느 사과도 같은 것은 없다. 모두가 특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과의 개별적인 특수성을 통해 사과라고 하는 보편적이면서 추상적인 개념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사과는 개별적인 구체적인 사과와는 다르다. 흰 깃털의 흰색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특수한 흰색이다. 반면에 흰 깃털을 희다고 할 때의 흰색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으로서의 흰색이다. 개별의 흰색과 보편의 흰색을 같은 것이라고 하면 안 된다.
결국 맹자는 개별과 보편, 구체와 추상이라는 문제를 교묘하게 엮어서 고자의 주장을 꺾었다. 나아가 맹자는 이러한 왜곡된 논의를 바탕으로 사람과 개돼지의 구별과 차이를 없애서 같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고자는 앞의 두 논쟁에서와 마찬가지로 개별적인 사물이 각자 타고난 대로 살아가는 것, 곧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물의 성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맹자가 대응한 것은 보편적인 성이었다. 이 뒤에 고자의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 때문에 논쟁의 결말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맹자』라는 책에 따르면 개별과 보편, 구체와 추상을 같은 것으로 만들어 버린 맹자의 간계奸計에 의해 고자는 패배한 것이 된다.
맹자가 이런 간계를 부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람과 짐승의 성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무엇인가. 맹자에게 사람은 짐승과 달리 그 본성이 선할 뿐만 아니라 인의예지가 있으며 측은지심과 같은 사단이 있다. 이러한 구분이 없다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문제는 사람과 짐승의 구분이 선언적(선험적)으로 주어졌다는 데에 있다. 맹자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몇 가지 유비를 들었지만 대부분은 근거가 없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누구나 구하려 한다고 했지만 거꾸로 아이를 물에 빠뜨리는 사람도 충분히 있을 수 있으며 실제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의 선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맹자는 사람과 짐승을 추상 차원에서 절대적으로 구분함으로써 구체로서의 짐승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막아놓았다. 짐승과 적절한 관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겁에 질린 소를 보고 차마 그 죽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으면서 애처롭게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는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하며, 그 때문에 푸줏간을 멀리 하는 수준의 관계밖에 가질 수 없다. 이런 철학으로는 가축을 기를 수도 없고 가축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다만 그 짐승을 죽이는 것을 직접 보지 않는다면 고기를 얻어먹을 수는 있다). 나아가 이런 철학으로는 농사도 지을 수 없다. 짐승과의 관계도 제대로 맺을 수 없는 철학으로는 하늘과 땅, 거기에서 자라는 식물과 여기에 대한 인간의 작용과 반작용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생태라는 문제는 끼어 들 여지가 없다(맹자가 말한 ‘행기소무사行其所無事’를 ‘대상의 본성을 따라가는 인식과 실천을 긍정하는 무위와 유위의 변증적 통일의 원칙’[황종원]으로 보기 위해서는 수水와 같은 대상의 본성부터 논의되어야 하며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론[예를 들어 仁順] 역시 필요하다. 맹자에는 대상의 본성에 따른 실천이 아니라 리利에 따라, 곧 일을 매끄럽게[無事히] 잘 처리하려는 실천[行水] 이상의 논의가 없다. 참고로 『서경』에는 ‘行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맹자와 고자와의 논쟁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맹자나 고자의 철학 자체는 아니다. 승패의 문제는 더군다나 아니다. 우리는 다만 그 논쟁을 통해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 이외의 모든 대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가, 그 방법은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 내적인 것인지 외적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대상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주체인 사람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의 본성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 의미는 이어지는 맹자와 고자의 마지막 네 번째 논쟁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박석준(흙살림 동일한의원 원장, 동의과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