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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살림 -월령의 지혜를 배운다

8월, 햇살의 변화와 풀벌레소리의 전언(傳言)
나무그늘과 땡볕이 천국과 지옥 차이라고 느껴지는 8월은 그래도 가을로 가는 절기 입추(立秋)와 처서(處暑)가 들어 있는 달입니다. 가을도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한여름이 제 몸을 다 살라먹고야 가을로 변합니다. 그래서 신수현 시인은 입추를 “아직 덜 식은 몸이 뒤척인다// 바람만 스치면 미쳐버리는 불꽃같던 나날/ 겨우 이겨내고/ 여민 가슴”(「입추」에서)이라고 표현합니다. 괴산 밭에는 대학찰옥수수가 나가고 옥수수 서있던 사이사이에 콩을 심고 8월로 들어섭니다. 올해는 장마가 빨리 끝나고 유래 없는 폭염이어서 일하는 사람도 작물도 힘듭니다. 심어놨으니 어쩌겠냐고 어르신들은 경운기에 노란물통을 싣고 새벽 밭으로 갑니다.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사람 일이 많아지고 또 사람 일이 많아지면 하늘이 알아서 도와주는 것이 농사입니다.
8월의 변화 중 눈에 띄는 것 하나가 햇살입니다. “처서 들어서면/ 햇살이 변한다/ 푹푹 찌는 무작정 뜨거운 볕이 아니라/ 작정한 따가움이다/ 마치 냄비 밥 할 때/ 한 번 후루룩 끓고 난 후/ 불꽃을 조정하며 마음에 그리는/ 어떤 느낌처럼/ 하나하나 찾아가는/ 하나하나 아무리는/ 하나하나 생의 목적을 끄집어내주는/ 이 연금술鍊金術의 마지막은/ 황금이삭이다/ 그래서 뙤약볕에는 골똘히 생각하며/ 하나하나 끄집어 올리는/ 황금빛 고리 같은 게 있다”(오철수 「뙤약볕」 전문) 그 볕을 작물들이 알아 “여민 가슴”으로 만들어 채웁니다. 한여름을 한껏 제 소유적 본능을 추구는 시간이라고 한다면 이제부터는 자기의 의미를 생각할 때입니다. 존재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며 결실로 마음의 전회를 이뤄야합니다.
그런 자연의 시간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8월의 풀벌레울음소리는 깊습니다. “우주의 어떤 빛이 창 앞에 충만하니/ 뜨락의 시린 귀뚜리들 흙빛에 몸을 대고 기뻐 날뛰겠다”(이시영 「가을」 전문). 우주의 어떤 사인이 풀벌레를 땅 속에서 불러내고, 몸을 점점 더 짙은 흙빛으로 바꾸게 하고, 다른 소리도 아니고 꼭 제 목소리로만 울게 합니다. 마치 한여름을 넘어선 초록생명들에게 무언가를 고지(告知)하는 행위 같습니다. 제겐 그 울음소리가 한여름의 격정적 삶에서 결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처럼 듣습니다. “풀벌레소리에/ 귀가 깨끗해진다/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곳으로부터/ 또록또록 들리는 소리/ 어둠의 투명한 깊이를 만들고/ 무량한 넓이를 만들며/ 나를 작디작은/ 풀벌레로 만든다/ 맞다 지금 나는 풀벌레 독경소리에/ 깎여나간 가는 다리와 양팔이 / 흙색으로 변하는 중-/ 불면조차 시리도록 깨끗하여/ 나는 따라 울 수도 없다/ 구전口傳만 되는 깨끗함의 경전經典 마지막 구절은/ ‘목소리를 생명과 바꾼다’일 것이어서/ 아무래도 살아 있는 동안/ 다다를 수 없을 것 같다”(오철수 「풀벌레소리에 귀의(歸依)할 수 없어」 전문)
그렇게 땡볕과 풀벌레소리가 가을의 마음자리를 알리고, 동시에 그 마음을 알아챈 초록생명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가늠하며 8월의 일을 합니다.
- 오철수(시인.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