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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에 길을 묻다 006
박석준(흙살림 동일한의원 원장, 동의과학연구소 소장)
성급해진 맹자
“요즈음 서양에서 도덕성 운운하는 자는 기독교 원리주의자 아니면 파시스트 혹은 극우파로 몰릴 위험이 있다(허경, ?역자 서문?. 줄리앙,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 소수).” 이런 사태는 왜 벌어진 것일까? 그것은 니체 때문만도 아니고 포스트모더니즘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도덕이라는 문제 제기 자체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神이든 이성이든 그 무엇이든 누군가가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도덕을 내세우게 되면 그 순간 그 도덕은 상대적이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그런 절대적인 도덕은, “신이란 무엇인가, 이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제기에 다시 답을 해야 하며 그 답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실제 역사에서 달랐기 때문이다. 그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우려면 그것이 ‘옳다’라고 하는 절대적인 믿음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이런 구도 속에서는 절대적인 믿음 사이의 결별이나 대개는 투쟁 밖에 나올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서양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도덕에 관한 논의가 별로 나오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타락해서도 아니고 먹고 살기 힘들어 도덕 따위에 무관심해져서도 아니다. 도덕이라는 절대적 기준을 설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문제였던 것이다. 이런 사태는 최근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동아시아의 고대에 시작되었다. 그 전형적인 예가 ??맹자??에 나온다.
맹자는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양주와 묵적의 무리를 쳐서 없앨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고자告子와 논쟁을 벌였다.
고자는 맹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그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묵자에게서 배웠다고도 하고 맹자의 제자였다고도 하고 누군가가 그 이름을 가탁해서 지어낸 것이라고도 한다. 그에 관한 자료는 ??맹자??와 ??묵자?? 이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도 모두 고자를 비판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지만, 우리의 관심은 고자의 사상 자체가 아니라 맹자와 고자의 논쟁이 의미하는 바이다.
첫 번째 논쟁
고자에게 사람의 본성은 타고 난 것이며 거기에는 살아간다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이나 의미는 포함되지 않는다. 태어난 대로, 타고난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뿐이다(“生之謂性”). 사람의 경우, 본성은 식색食色이다(“食色, 性也”). ‘식색’은 생존과 번식이다. 삶의 보존과 번식이 사람의 본성이므로 삶을 잘 기르고(양생養生) 온전하게 하는 것(전생全生)이 중요하다. 의義나 예禮, 법法과 같은 어떤 외부의 강제나 구속도 삶을 온전하기 기르는 데에 방해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고자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맹자와의 첫 번째 논쟁을 살펴보자.
고자가 말했다. “성性을 버들가지라 하고 의義를 바구니라고 한다면 사람의 성으로 인의를 실천하게 하는 것은 마치 버들가지로 바구니를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러자 맹자가 말한다. “선생은 버들가지의 성을 거스르지 않고[순順] 바구니를 만들 수 있는가? 버들가지를 해치고 나서야 바구니를 만들 것이다. 만일 버들가지를 해쳐서 바구니를 만든다면 사람을 해쳐서 인의를 실천하게 한다는 말인가? 천하의 사람들을 끌어들여 인의를 해칠 것은 바로 선생의 말일 것이다.”
고자에 의하면 버들가지는 ‘밖에서’ 어떻게 힘을 주는가에 따라 바구니도 될 수 있고 의자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버들가지가 잘 구부러지는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버들가지가 바구니가 될지 의자가 될지는 밖의 조건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그렇다면 고자에 대한 반론은, 버들가지에는 이미 바구니가 들어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것도 아닌 바로 바구니가 들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맹자의 반론은 동문서답처럼 들린다. 고자는 버들가지의 구부러지는 본성에 따라 바구니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맹자는 곧바로 그것은 사람을 해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버렸다.
맹자의 말은, 인의라는 것은 밖에서 강제로 힘을 주어, 곧 사람을 해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성으로써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맹자에게 인의는 양초 속에 박혀 있는 심지처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내 마음에 인의라고 하는 씨앗이 심어져 있으며 이는 친親(피붙이 또는 가까이 해야할만한 사람)부터 시작하여 넓혀가는 것이다. 그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로서는 고자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려했을 것이다. 주희는 고자의 입장을 순자의 성악설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는데(??맹자집주??), 이를 보면 맹자가 고자를 왜 적대적으로 대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주희는, 고자의 말대로 한다면 인의는 사람의 본성을 해치는 것이어서 사람들이 즐겨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그러나 이런 판단에는 사람의 본성이 조건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만일 사람의 본성이 선하고 그것이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고자가 무어라고 주장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다. 공자의 말처럼 이단을 공격해봐야 해害만 되기 때문이다). 고자의 사상은 공자의 인 개념을 인의로 바꾼 맹자로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없애버려야 할 이단이었다. 이러한 맹자의 입장은 이어지는 두 번째 논쟁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