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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강, 어느새 가을 기울어 들국 피고
흙살림 조회수 435회 17-10-23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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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살림 -절기의 지혜를 배운다

 

 상강(霜降), 어느새 가을 기울어 들국 피고

-유민채「상강 무렵」/이상국「상강(霜降)」/박두규「상강霜降」

상강(霜降)은 서리가 내릴 때로 24절기 열여덟 번째 10월 23일입니다.

밤 기온이 매우 낮아져 수증기가 지표에서 엉겨 서리가 됩니다.

서리가 내리면 해마다 농부를 지치게 하는 그 강인한 풀도 시들시들 합니다.

보통 ‘섶이 죽는다’는 말로 표현되는 이 현상은 내부로부터 생명을 떠받치던 결기 같은 것이 꺾이는 것입니다.

생명의 상태 변화입니다.

그래서 자연의 한 이름인 인간도 상강에 이르면 밖으로 뻗쳐나가려는 생각을 정리하고,

후회는 후회대로 남겨두고 내부적 생명의 아궁이를 돌보며 겨울을 준비할 때입니다.

정말 그렇다고 강원도의 귀한 시인은,

“나이 들어 혼자 사는 남자처럼// 생각이 아궁이 같은 저녁// 누구를 제대로 사랑한단 말도 못했는데//

어느새 가을이 기울어서// 나는 자꾸 섶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이상국 「상강」 전문)고 노래합니다.

그 생각을 받아서 다른 시인은 어느새 기울어버린 가을 서릿발 위에 서서,

“모두가 지극정성 낮은 자세로 한 시절을 맞으니 나도 이제 말도 좀 줄이고 먹는 것도 줄여야겠다.

수심 깊이 외로워져 퀭한 눈빛에 노을이 젖으면 그나마 여름 설거지도 끝난 것인가.

이제 누가 위선을 떤다고 나무라도, 바짝 엎드려 있으면 그만이다.”(박두규「상강」에서)고 삶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수심 깊이 외로워져 퀭한 괴산 목도 강변이나 우리네 생에도 들국 노란 꽃봉오리 흔들립니다.

이런 아름다운 시간, 서리 내리기 전에 만삭이 된 벼를 추수해야 하기에 농부는 바쁩니다.

 

상강 무렵

                                                               - 유민채

 

가을걷이 때 아낙은 만삭이었다

예정일을 일주일이나 넘겼다

들판은 납작하게 누우며 빛을 잃어갔다

한낮의 볕을 쏘이는 넝쿨풀 가지에

성냥을 그어대면 확 불이 일 것 같았다

아낙은 촉진제를 맞기 위해 자리에 누웠다

초록을 잃어가는 들판위로 햇볕은 낮게 쏘아 붙였다

콩깎지를 분지르는 늙은이의 손이 한결 거칠었다

머릿수건에 갈고리모양 엉겅퀴씨앗이 붙었다

새벽 아기는 우렁차게 첫울음을 터뜨렸다

홀쭉해진 벌판에 서리가 빛났다

 

 

상강 무렵, 바야흐로 모든 것이 자기의 정점으로 향하여 최선을 다하듯 ‘조밀한 시간’을 이룹니다.

분만의 시간도, 가을이 가기 전에 자기 일을 끝내려는 햇볕도, 신생(新生)을 바라며 기다리는 늙은이의 시간도,

그것을 보겠다고 머릿수건에 붙어온 엉겅퀴씨앗의 시간도 그 정점으로 모여듭니다.

그리고 그 조밀한 시간은 새 생명의 울음으로 변하고 “홀쭉해진 벌판에 서리가 빛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상강 무렵 태어나신 분이 아버지 뒤를 이어 괴산 인근 마을에서 이장 일도 보고 농사도 짓고 시도 쓰고 있으니

기운 가을도 뿌듯할 것입니다.

                                                                                                                                                      - 오철수(시인. 문학평론가. 흙살림농장농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