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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살림 -절기의 지혜를 배운다
한로(寒露), 구절초 맑은 눈을 얻는 시간
목도 강변을 따라 구절초 피고 길섶으론 코스모스가 한창인 한로(寒露)는 24절기 중 열일곱 번째로 10월 8일입니다.
찬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니 대지의 피부에 ‘차다’가 시작된 것입니다.
따뜻함과 꽃이 만나면 화창(和暢)이 되지만 차가움과 꽃이 만나면 고절(孤節)이 됩니다.
꼭 그와 같은 품성을 가진 친구가 목도시장에 흙살림동일한의원을 열었는데 그이 하는 말,
“어르신들 아픈 곳이 다 같아. 허리 어께 무릎 팔이야.”
그런데 한로 지나면 서리 내리기 전 가을걷이 서두르느라 그 육신들 다 논밭에 붙어 있습니다.
그분들을 생각하는 것,
“고분을 출토하듯 한 줄 한 줄 호미로 캐낸 고구마
/ 한 때 나는 황금빛 들녘을 당신 휘어진 등이라고 믿었다
/ 알곡을 등에 지고 구부러져가는 등뼈
/ -줄임- 저녁에 밭에서 뜯어온 상추, 부추, 가지, 고구마 순을 다듬어 저녁 찬거리를 만들고 생선 한 토막 굽는다
/ 이윽고 구절초 맑은 눈을 얻는 시간”(서은「시월 하순」에서)은 아닐런지요.
이 무렵 나뭇잎들을 보십시오. 수척합니다!
이르게 단풍이 든 것도 더러 있고, 어쨌든 지난여름에 대한 마음은 확실히 정리한 듯한 표정입니다.
여름이 홀쭉해지고 가을이 눈에 띄게 깊어집니다.
지난여름의 공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지금까지 제 안에 들어와 있는 관계들 하나하나 온전하게 맞이하여 갈무리하는 삶의 시간입니다.
한로
- 이상국
가을비 끝에 몸이 피라미처럼 투명해진다
한 보름 앓고 나서
마당가 물수국 보니
꽃잎들이 눈물자국 같다
날마다 자고 나면
어떻게 사나 걱정했는데
아프니까 좋다
헐렁한 옷을 입고
나뭇잎이 쇠는 세상에서 술을 마신다
자연의 한 이름인 인간도 “가을비 끝에 몸이 피라미처럼 투명해”지는 느낌입니다.
자연이 우리 삶의 행로를 바꾼 것입니다.
지난여름이 일으킨 소유적 욕망이 빠져나가자 아파도 좋을 수 있는 존재가 살아납니다.
크게 아프고 일어난 분들이 ‘세상이 보석처럼 아름답다’고 하는 바로 그 세상,
나와 늘 함께 하면서도 욕심으로 하여 보지 못했던 세상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나뭇잎이 쇠는 세상에서 술을 마신다”는 허심(虛心)이 됩니다.
이 세상의 나무들도 여름의 소유적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놓여난 “헐렁한 옷을 입고” 자기에게 온 이 세상을 갈무리합니다.
그런 삶을 촉구하듯이 아파트벤치에 앉아 있던 할머님이 말씀하십니다.
“인사를 하며 지나갈 때마다 어디 가느냐, 꼭 묻습니다.
-줄임-.
어디 가? 어디 가? 그런데 오늘은 대뜸 ‘참 이쁘다, 참 젊다.’ 그러시는 겁니다. 순간 나는 당황했지만”(안오일「한로」에서),
오늘이 바로 한로입니다.
- 오철수(시인. 문학평론가. 흙살림농장농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