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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우, 살리는 신
흙살림 조회수 674회 17-04-2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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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살림 -절기의 지혜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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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우(穀雨)는 살리는 신(神)입니다

 

 곡우(穀雨)는 곡식비가 내린다는 양력 4월 20일입니다. 산천초목이 살아나고 대지가 생의(生意)로 넘칩니다. 봄비가 내릴 때 대지의 표정을 보십시오. 성스러움 그 자체입니다. 고마움이고 또 고마움입니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내겠다는 성(聖)과 속(俗)을 넘어선 생명의 몸짓입니다. 이르게 고개를 내민 풀들과 초록이파리들이 모두 아기의 입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하다못해 콘크리트구조물도 목욕물을 끼얹은 것처럼 뽀얗게 됩니다.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까지도 겨울 때를 벗게 합니다.

이렇게 곡우 무렵의 봄비는 모든 것에 닿아 모든 것을 살립니다. “내 마음속 자갈밭 귀영치에도/ 강파른 씨톨 하나 이윽고 눈을 떠서// 이제는 하늘도 젖은 하늘 아래/ 저 둔덕 밑의 꽃다지며 황새냉이꽃,/ 벌써 저렇게 차오르는 보리밭이랑/ 한번쯤 목메임으로 흐르려는가”(고재종「봄비 내리면」에서), 그렇게 살려냅니다. 이처럼 모든 것에 닿아 살려내는데 어찌 신기로운 神이 아니겠습니까! 생의를 불러일으켜 생으로만 나아가게 하기에 곡우야말로 신령한 힘이고 그 자체로 신입니다. 그 신으로 하여 초록 피가 돌고 막 살아납니다. 겨우내 말라 있던 모든 것이 제 빛깔을 띱니다. 흙이 빗물을 먹는 냄새 또한 기막힙니다. 간절하게 필요한 것들이 서로에게 가 닿을 때는 모두 저런 냄새가 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살리는 신, 곡우이고 봄비입니다.

 

청명과 입하 사이에

-최영진

 

곡우(穀雨)날

이른 새벽부터 봇물 터지듯 내리는 비

 

세상과의 경계도

그리움과의 사이도

가득

 

내 자궁에 출렁이는 소리 듣는다

 

청명과 입하 사이

흙내 속

알몸의 곡우 걸어가신다

아, 연둣빛 맨발

 

곡우 날, 비가 쏟아지고 생명적 활동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생명과 생명적 지향(“그리움”) 사이를 초록이 밀고 나옵니다. 그 순간, 여성인 시인의 몸이 “내 자궁에 출렁이는 소리”로 느낍니다. 그 비가 “청명과 입하 사이/ 흙내 속/ 알몸의 곡우 걸어가신다/ 아, 연둣빛 맨발”로 형상되는 것입니다. 그 빗줄기가 “강파른 씨톨” 하나까지 다 살려내십니다.

이렇게 살리는 신이 오시니 청명한 마음자리를 가진 인간은 본격적인 논농사를 준비합니다. 준비는 종자 볍씨 끝에 달린 까끄래기를 떼어내고, 침종하고, 모판을 만드는 순서입니다.

- 오철수(시인. 문학평론가. 흙살림농장농부)